[서울교육방송 장창훈 보도국장]=의심은 항상 이중성이다. 의심해야한다. 그러나, 의심을 버려야한다. 우리는 의심과 믿음 그 중간지대를 살아간다. 보이스 피싱과 사기꾼이 널려있는데, 분별없는 믿음은 지뢰밭을 밟는 것과 같다. 그러나, 복음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믿지 못하는 의심은 안개와 같다.
나는 베네까페를 자주 가는데, 그곳은 쿠폰 도장을 5개만 받아도 무료 커피가 주어진다. 나는 쿠폰에 도장을 날마다 받는다. 의심이 없다. 경험이 그것을 증명하고, 쿠폰에도 분명히 그렇게 적혀있다. 성경 계시록에도 하나님의 인을 맞은 자는 해함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이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이다. 하나님의 인(印)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며, 말씀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인감도장이시다.
疑는 자세히 관찰하면, 좌측 사람과 우측 사람이 존재한다. 좌측 사람은 匕矢이고, 우측 사람은 矛의 변형이다. 칼과 화살과 창을 뜻한다. 무기는 그 끝과 방향을 누구도 예측할 수가 없다. 권력은 잡은 자가 휘두르지만, 결국 칼로 망한다. 화살을 쏘는 것은 궁수지만, 화살끝이 어디로 향할지 누구도 모른다. 이러한 해석은 무기를 상징적으로, 비유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疑는 2사람의 합성이며, 사람이 좌측과 우측으로 고개를 갸우뚱하는 모습이다. 갈림길에서 망설이는 표정이다. 의심이 생기는 것은 2가지 갈림길에 놓여서 그렇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백성들을 추궁했다. 머뭇머뭇하지 말라고 꾸짖고 재촉했다.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백성들은 어떤 신이 참된 하나님인지 분별하지 못했다. 왜냐면, 엘리야는 사회적으로 도망자이고, 현상수배범이고, 국가경제 파탄을 예언한 선지자이니, 백성들이 헤깔린 것이다. 이런 상태가 바로 疑이다.
[열왕기상 18:21]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믿는 자마다 반드시 결정해야할 것이 있다.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주인지, 혹은 다른 구원주가 있는지, 그것을 결정해야한다. 예수님도 믿으면서, 돈도 믿으면서, 권력도 믿으면서, 영웅도 믿으면서, 다신론적 구원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국 예수님의 길을 가지 못한다.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예수도 믿고 교주도 믿고, 하나님도 믿고 바알도 믿고, 그것은 불가능하다. 疑의 반대는 眞이다. 疑는 갈팡질팡이고, 眞은 하나를 결정하고, 하나님께 드릴 제사음식을 숟갈로 맛보는 모습이다. 여기서 匕는 수저의 형상이다. (匕는 칼, 비녀, 수저의 의미가 있다)
의심의 대명사로 도마가 있다. 도마는 예수님의 첫 번째 부활모임에 참여하지 않았다. 유대인으로서 안식일을 지켰으니, 부활절 모임은 중요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다는 그 모임에 빠진 것이다. 마음에 의심이 생기면 교회에 출석하지 못한다. 그때, 도마의 친구였던 마태와 베드로가 적극 권면하고, 막달라 마리아는 열변을 토하고, 갈릴리 뱃사람 일곱친구들이 모두 모여서 도마를 설득했을 것이다. 드디어, 도마가 두 번째 부활모임에 반강제적으로 참석했다. 예수님은 도마의 손가락으로 못자국을, 손으로 창자국을 확인하게 하셨다. 사실확인의 저널리즘이다. 도마는 모든 의심이 해소됐다. 도마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파격적 고백을 한다.
과연, 도마가 예수님의 못자국을, 창자국을 만지면서, 상처만 느꼈겠는가? 십자가의 고난과 아픔과 슬픔과 고통을 동시에 느끼면서, 그 상처를 위로하는 ‘사랑의 연고’를 발라 드리고 싶었을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도마의 반응이 생략되었고, 대부분 독자는 도마가 로마병정처럼 상처를 만졌을 것으로 짐작한다. 의심많은 도마도 긍휼의 마음이 깊었을 수 있다. 스승의 상처를 손가락으로 만지고, 손으로 옆구리 상처를 넣었는데 그 마음이 애닯지 않을 제자가 어디에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