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동생보다 가난하다. 동생은 고향땅 농장을 물려받고, 나는 서울에 살다보니, 그럭저럭 살아냈다. 고향에 가면, 동생은 삽을 들고 농장을 돌아다닌다. 그때, 나는 노트를 들고 글을 쓴다. 대문에 들어서면, 동생은 흙먼지를 털었고, 나는 노트북을 펼치고 수필을 정리했다. 동생이 내게 항상 물었다. “형처럼 살아야 편할텐데….”
겉보기 등급으로 글쓰는 것이 농사보다 편해 보인다. 내가 보기에도 삽보다 펜이 가볍고,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되니, 쉽다. 그러나, 삽질이나 펜끝이나, 노동력은 거의 비슷하다. 어떨 때는 머리에서 불이 난다. 삽으로 얼어붙은 땅을 파듯, 글이 한줄도 써지지 않으면, 나는 빙글빙글 맴돈다. 나는 펜이 삽이고, 종이가 땅이다.
언젠가 교회에서 목사님이 “예수님처럼 버려지지 않으면, 버려짐의 고통을 알 수 없다”라고 말씀했다. 아!! 맞다. 십자가 고통을 안다는 것은 버려질 때 비로소 가능하다. 아마도 그때 설교 말씀 본문은 베드로 장모가 몸살감기에 걸렸는데, 문병을 갔던 사건이다.(마태복음 8장) 그 대목을 읽으시는데, “집에 들어가사”,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로 끊어서, 동사에 힘을 엄청 싣고 강조했다. (앞으로 이렇게 성경을 읽기로 다짐했다.)
마치 삽에 힘을 주고서, 쟁기에 힘을 주고서, 중노동을 하듯이 성경본문을 갈아엎는다. 그렇게 읽으니, 예수님이 정말로 베드로 집에 들어갔다는 것이 실감적으로 와 닿았다. 그리고, 예수님은 열병에 앓아누운 베드로 장모를 보셨다. 손을 만지시고, 기도를 하셨거나, 긍휼함으로 전염당하셨거나….. 베드로 장모의 열병이 떠나갔다.
노동에는 3가지 종류가 있다. 육체노동, 정신노동, 영적노동이다. 육체노동도 힘들지만, 정신노동도 힘들고, 특히 하나님께서 특별히 쓰시는 사역자들의 삶은 영적 노동이 수반된다.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의 말씀을 통해 보면, 대신 짊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