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해석을 함에 있어서 유기체적 해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뉴턴의 과학적 사고방식은 인류에게 많이 유익했으나, 생물학자들에게 뉴턴의 방식은 유용하지 못하였다. 뉴턴은 쪼개고, 분해하고, 분리해서 현미경으로 들여야본다. 생물학자는 “물질과 생물은 다르다”라고 비판한다. 뉴턴은 머리와 몸과 다리를 분리해서 설명할 수 있다. 생물학자는 다르다. 분리하면, 그 사람은 죽는다. 솔로몬의 재판과 같다. 아이를 나눠서 두 동강 내겠다고 하니, 그러한 공평과 정의앞에 진짜 아머니는 자신의 것을 희생했다. 생명체는 쪼개지면 죽는다.
성경해석은 합리적 사고를 가지고, 다양하게 말할 수는 있으나, 성경 자체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어떤 특정한 구절을 임의로 발췌하면, 그 구절이 독자적으로 생명력을 갖지 못할 수도 있다. 어떠한 성경구절이나 사건은 앞뒤 문맥과 함께 전체 흐름에서 의미를 갖고 있다. 장창훈의 심장이 살아있는 것은 내 몸의 혈관과 상관있다. 그처럼 성경구절은 위치한 그곳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몇몇 종교 지도자들은 성경해석을 뉴턴방식으로 분리해서, 그것에 해석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매우 위험하고 조심해야할 방법이다.
옛날에는 사회는 사람들의 집합으로 봤다. 이러한 정의는 개념이 단순하지만, 모순적이다. 사회는 사람들로 구성되지 못한다. 각 사람들의 사연을 사회가 담아낼 수 있는가? 내가 지금 칼럼을 쓰고, 고민하고, 괴롭고, 글이 막히면 곤란한 감정상태를 사회가 담아낼 수 있는가? 여기서 ‘사회’는 도대체 무엇인가? 순천고등학교 동창회에는 장창훈이 포함된다는 정의는 맞다. 여기서 장창훈은 ‘졸업생 장창훈의 신분’이지, 지금 글을 쓰는 장창훈의 심리상태는 아닐 것이다. 이처럼 어떤 단어도 그 의미와 뜻은 그곳에 위치한 문장과 문맥을 통해서 특별한 해석을 갖는다.
누가복음 10장에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나온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었고, 율법교사는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했다. 여기서, “이와 같이 하라”는 말이 너무 좋아서, 그것만 차용하며, 자신의 말을 주장하고 끝에 성경구절 누가복음 10장 37절의 말씀처럼 “이와 같이 하라”고 했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또한, “자비를 베푼 자가 이웃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낭패다. 전체 문맥에서 “자비를 베푼 자가 곧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다.
율법교사에게 예수님은 이웃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그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어떻게 받아드리냐로 결정될 것이다. 누가는 그것에 대해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만약, 율법교사가 니고데모처럼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새로운 인물로 거듭났다면, 예수님의 자상한 성경강론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자비’처럼 율법교사에게 도움이 된 것이니, 그런 측면에서 이웃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