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크게 말과 글로 구분된다. 몸짓 언어도 말의 영역에 속한다. 말은 사람이 움직이면서 어떤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 먹을래”라고 엄마가 아이가 물으면, 아이가 아무 말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안먹겠다는 몸짓 언어다. 말은 텍스트와 몸짓 언어로 구성된다. (성조와 감정도 포함된다.)
문자는 몸짓 언어가 어디에 있을까? 문자는 ‘말의 텍스트’만 나열된 것 같지만, 문장과 맥락과 흐름과 선택된 단어에서 몸짓 언어가 표출된다. 맥락으로 살필 것!! 이것은 어떤 사람이 말을 할 때 그 표정과 분위기와 의도를 파악해서 경청하는 것과 같다. 들을 때, 편견의 안경을 벗고서 자세히 듣고, 깊게 이해했다면, 상대의 말을 알아차린다. 그처럼 문자 텍스트는 그 문장의 앞뒤 문맥을 살피고, 전체적 흐름으로 살펴서 이해해야한다.
언어는 상자와 같다. 우리는 상자의 겉만 보고, 그 속에 무엇이 있을지 감히 짐작할 수 없다. ‘사랑’이란 단어를 어디선가 마주치면, ‘사랑’의 단어속에 무엇이 있을지, 모든 사람은 각자 생각으로 인식할 뿐이다. 그래서 ‘암흑상자’와 같은 언어다.
함축(含蓄)은 함(상자)속에 쌓여있는 것이다. 상자는 언어의 문자이며, 그 속에 뭔가 들어있는 것이다. 어떤 문장은 유리상자처럼 뜻이 드러난 경우가 있다. 문장을 통해 그러한 뜻을 발견하는 것이 맥락을 통해 이해하는 독서력이다.
A : 너는 사과를 좋아하니? 배를 좋아하니?
B : 나는 사과를 좋아해.
B가 ‘배를 싫어하지는 않아’라는 말을 추가하지 않으면, B는 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석된다. 문자는 이와 같다. B는 배에 대한 의견을 말하지 않았지만, A의 질문이 선택형이므로, B의 대답으로 그렇게 결정된다. B가 배를 좋아한다면, “나는 배도 좋아해. 그런데 사과를 더 좋아해”라고 말을 해줘야, 상대는 오해하지 않는다.
A가 만약 “너는 배를 싫어하는구나”라고 속으로 생각하거나, 물을 수도 있다. 그때, B가 “내가 언제 배를 싫어한다고 말했니!!”라고 불쾌하게 생각할 수도 있으나, B의 표현력 때문에 불거진 일이다. B가 배도 먹고 싶다면, 배에 대한 의견도 표현해야한다. 언어가 갖는 상징성이 이와 같다.
어떤 교회는 성전입구에서 핸드폰을 수거한다. 보완을 철저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예배시간에 감시자가 돌아다니면서 핸드폰 녹취를 점검한다. 그러한 통제 시스템은 성도들에게 “너희는 녹취하고 있다”라는 강력한 문장을 함축한다. 핸드폰 수거와 감시자가 명령어가 되어서, 성도의 자유를 억압한다. 성도들은 민원창구를 통해서 “제도가 너무 부당하다”고 하소연할 수도 있지만, 해결될 수 있을까? 핸드폰 수거와 예배 감시자가 명령어가 되어서 성도를 통제하는 것은 ‘규제의 언어’를 말한다. 교회는 ‘강한 규제’가 언어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음을 인지해야한다.
나는 대화를 나눌 때 가급적 핸드폰을 비행기 모드로 전환한다. 예배때도 그렇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대화중에 핸드폰을 탁자에 올려놓는 행위는 몸짓 언어로서 “대화를 녹음할 수도 있다” 혹은 “지금 대화가 녹음중이다”가 함축된다. 핸드폰으로 녹음을 하는지, 안하는지는 사실을 확인해야 알겠지만, 그러한 행위가 그렇게 보여진다. 드라마에서 자주 그러한 장면을 보여줌으로 문화적 표현으로 들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핸드폰은 대화중에 가급적 비행기 모드로 전환하는 것이 좋다. 이것이 몸짓 언어의 함축성이다.
가장 강력한 몸짓 언어의 설교자는 예수님이다. 제자들의 권력암투앞에서 예수님은 2가지 몸짓 언어를 보이셨다. 하나는 어린아이를 세우고서 품에 안고서 “낮은 권력”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겉옷을 벗고서 스스로 낮아져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섬김의 권력”을 말씀하셨다. 낮은 권력과 섬김의 권력은 줄여서 ‘사랑’이다. 형제의 손을 잡아주고, 어깨를 쓰담쓰담해주는 것, 그 작은 몸짓 언어가 성도의 교통을 이루는 성령의 숨결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