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책을 2가지 방법으로 탐독한다. 하나는 쭉 읽기, 다른 하나는 끊어서 읽기다. 작가로서 나의 전문직업에 충실하기 위해서 나는 전문분야 책을 날마다 섭렵한다. 기계공학도로서 문필가의 직업을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도 열역학 2법칙 엔트로피를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하지만, 내게 엔트로피는 언어적 텍스트로 사용될 뿐이다.
언젠가 교회에서 목사님이 “성경 에세이 작가가 되세요”라고 내 눈을 보면서 당부했다. 나는 에세이 작가인데, ‘성경’이 붙었다. 이후 그 목사님 조언 덕분에 성령께서 나를 성경속으로 날마다 초대하신다. 그러다보니, 성경이 내게 뉴스가 되고, 글을 쓸 때마다 두더쥐 게임처럼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때론 빨간 신호등처럼 장시간 날 붙잡아두기도 한다. 나는 성경이 참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작가로서 전문분야의 실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날마다 고민하고, 번뇌하고, 다양한 문체를 참고하며, 세상뉴스를 아는데 게으르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친다. 몸살감기가 찾아와 밤샘 앓다가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신 예수님이 왜 내 손을 잡지 않으시나”라고 괴로워하다가, 아파도 작가로서 글쓰기 작업을 게을리 할 수 없음을 스스로 선언한다.
나의 아버지는 태풍이 불어오던 날, 집에 들어오지 않으셨다. 밤중에 삽을 들고 흠뻑 젖은 채로 오신 아버지는 잠시 눈 붙이시고, 새벽에 다시 삽을 들고 태풍과 싸우셨다. 그것이 농부의 정신이다. 인생은 사는 날까지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가끔 마음에 드는 학생들에게 책을 추천하곤 한다. 그때마다 내게 진지하게 물어오는 학생에게 책읽는 법을 넌지시 알려준다. 책은 교보문고에 너무 많다. 그 많은 책중에서 우리는 겨우 몇권, 몇십권의 책을 읽을 뿐이다. 읽어도 모두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서, 자신의 전문직종에 맞는 책을 선별해서, 꾸준히 읽는 것이 좋다.
아리스토텔레서의 물리학 강의 4권 14장에는 시간에 대한 개념이 나온다고 한다. (나는 읽어본 적은 없다.) 체계이론 입문(니클라스 루만, 새물결) p289에 나온 말이다. 나는 그 텍스트를 지금 인용한다. 내용이 매우 독특하고, 탁월하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책 인용) 이밖에도 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텍스트를 다시 읽으면서 흥미롭게 여긴 부분은 ‘지금’이 명사로 쓰여있는 점이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금에 관해’라고 말한다. 불어 번역에도 명사형으로 되어 있고, 내가 가진 독어번역에도 명사형으로 번역되어 있다. 하지만 내가 지금 ‘지금’이라고 말해야, 다시 말해 그걸 말할 때야 비로소 내가 무엇을 말하려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지금’은 부사이고, 일종의 ‘지시적 표현’으로, 이 말을 할 때 옆에 있는 사람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부사를 명사화하면 무언가를 구두로 말하는 상황에 대한 지시가 배제되고 만다. 이제 ‘지금’이 존재하게 되고, 성질상 언제나 ‘지금’이며, 계속 언젠가는 나타나고 나타날 수 있거나 나타났거나 나타나게 될 무엇이 된다. (중략) 시간은 ‘지금’들, 즉 지금이라는 시점들로 분할되는 전체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문자 문명이 낳은 결과임을 볼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체계이론 입문 p289)
우리가 오늘에, ‘오늘’이라고 말하면, 오늘에 그 오늘이 성립한다. 오늘은 2019년 5월 10일이다. 그런데, 내일의 오늘에 우리는 또 ‘오늘’을 말한다. 그 오늘은 2019년 5월 11일이 될 것이다. 왜 똑같은 ‘오늘’이 계속 날짜가 바뀔까? 그 오늘의 시간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공간인가? 인식인가? 어제로 사라진 ‘오늘’이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가? 우리는 이런 난해한 상황에 발생한다. 그런데, 문자로 ‘오늘들’로 표현하면, 모든 시간은 ‘오늘들’이 된다. 또한 문자로 ‘지금들’로 표현하면, 영원한 시간은 ‘지금들’로 표현된다. 미적분처럼 시간의 미립자를 설정하고 전체로 합산한 개념이다. 이러한 시간적 개념은 매우 유용하다.
대진여고 급식이 매우 맛있다고 한다. 그 학교 영양사들은 급식단을 특별하게 만들고, 균형있는 영양소를 위해서 매월 식단이 조성된다. 영양사들은 1달 식단을 짠다. 그리고, 30회 분량의 식사가 이미 정해져 있고, 날마다 점심때 제공된다. 학생들 입장에서는 날마다 새로운 식단인데, 영양사 입장에서는 30회를 한꺼번에 짠 것이다. 학생들은 날마다 점심을 먹고, 영양사들은 1달치 점심을 미리 설정해서, 날마다 배분하는 것이다.
급식이 독서라고 하자. 우리는 날마다 책을 읽는다. 그런데, 1달의 독서량을 미리 설정한 다음에, 분철로 독서를 하면 다른 개념이 된다. 날마다 책을 읽을 때는 순서별로 앞에서 뒤로 진행되고, 분철로 독서를 할 경우에는 전체를 설정하고서, 30회로, 10회로, 7회로 구분해서 읽는 개념이다. 둘은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르다. 시간의 조직화에 해당한다. (이렇게 읽는 책은 전문서적으로 1년, 2년, 5년, 10년 꾸준히 탐독할 중요서적에 대한 특별한 독서방법이다. 편한 에세이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서 음악을 틀어놓고 쓱쓱 읽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