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6장에 불의한 청지기 비유가 나온다. 누가복음 14장과 15장과 16장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14장에서 바리새인의 지도자 집에 초대를 받으신 예수님은 “끝자리에 앉으라”고 하시면서 큰 잔치 비유를 들었다. 그리고, 15장에 ‘어떤 큰 잔치’ 사건이 나오며, 탕자가 돌아온 후에 ‘아버지의 큰 잔치’ 비유도 나온다. 같은 맥락으로 흘러가고 있다. 누가복음은 드라마와 흡사하게, 의미적으로 연결지어서 편집되었다.
불의한 청지기는 누가복음 12장의 ‘진실한 청지기’와 대조된다. 그 비유에 보면, 주인이 도둑처럼 온다고 했는데, 16장에서 주인이 도둑처럼 와서 청지기의 직무를 해고했다. 16장의 청지기는 뭔가 발각된 것이다. 누가는 불의한 청지기를 말하면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의 단서를 달았다.
15장은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에서 시작하며,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로 시작한다. 예수님의 비유설교를 듣는 그룹은 3부류로 구분된다. 1) 제자들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3) 세리와 죄인들이다. 제자들은 성도들이고, 세리와 죄인들은 초신자들이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불편한 관계에 있는 집단’이다. 모든 비유는 3부류에게 동일하게 전해지는데, 불의한 청지기 비유만 ‘제자들에게 이르시되’라고 되어있고, 거지 나사로 비유는 ‘바리새인들’을 겨냥해서 말씀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시는 자들의 표현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렇다면, 불의한 청지기 비유는 ‘제자들에게 이르시되’라고 되어 있으니, ‘불의한 청지기=제자들’로 해석할 수 있을까? 이렇게 단정하면, 매끄럽지 못하다. 제자들이 먼저 깨닫길 바라면서도, 불의한 청지기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포함될 수도 있다. 성경을 해석하고 이해할 때는 하나의 틀을 고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성경을 고찰할 때는 2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나는 독자관점에서 작가관점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독자는 읽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인식관으로 텍스트를 보는 경향이 짙다. 의도적으로 작가의 관점을 인식해야, 독자의 인식관을 벗어날 수 있다. 둘째로 비유의 적용대상이다. 모든 비유는 자신에게 적용해야한다. 좋은 것은 자신에게 하고, 나쁜 것은 상대에게 적용하면, 결국 자신은 ‘나쁜 족속’에 속하게 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자신이 어떠한가를 항상 점검해야하는데, 그것이 말씀이다. 말씀을 읽는 태도는 자신을 직접 대입해서 ‘자신의 들보’를 성경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불의한 청지기를 읽을 때는 ‘불의한 청지기 장창훈’으로 넣고, 깊게 고찰하면, 의미가 서서히 윤곽을 잡게 되면서, 자신의 현실이 성경의 수면위로 떠오르게 된다. 돌아온 탕자 비유에서도 ‘돌아온 탕자 장창훈’으로 놓고서 읽어야, 느낌이 새롭다. 성경은 ‘내 이야기’가 비유로 감춰진 구원의 책이다.
1. 작가의 관점으로 이동할 것
2. 적용대상을 자신으로 할 것
3. 모든 비유의 열쇠는 예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