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5월 18일, 누가복음 18장을 읽었다. 18장에는 ▲한맺힌 과부의 1인 시위(불의한 재판관)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어린아이의 천국 ▲부자청년 ▲십자가 예언 ▲여리고 맹인 거지가 나온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는 부자청년 이야기와 연결된다. 바리새인이 기도한 내용과 부자청년이 살아온 삶이 거의 일치한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의를 행했으나 의인이 되지 못했다. 그처럼 부자청년은 1%가 부족해서 집으로 근심하며 돌아갔다. 바리새인의 기도를 옆에서 듣던 죄인 세리는 깊은 참회를 함으로 하나님께서 기도를 듣고 의인이 되게 하셨다. 그처럼 부자청년이 돌아간 후에, 남은 제자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깊게 뉘우치게 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신다. 비유와 실체가 이렇게 흡사한 것은 누가의 의도적 편집이 있다고 봐야한다.
어린아이의 천국과 여리고 맹인 거지 사건은 ‘꾸짖다’로 서로 연결된다. 아이들의 축복기도를 받고 싶었던 부모를 제자들이 꾸짖었다. 예수님을 큰 소리로 부른 맹인거지를 제자들이 역시 ‘꾸짖어서 잠잠하라’고 했다. 맹인거지는 조용하라는 소리를 듣고서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저항정신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일까? 예수님은 맹인거지를 불러서, 소원을 들어주신다. 아이들이 오려는 것도 “금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하신다. 제자들은 곧 예수님께로 가는 ‘문’(門)이다.
일반적인 문은 손님이 문을 두드리면 되지만, 사람의 문은 ‘문지기’로서 문이다. 문을 열수도 있고, 열지 않을 수도 있다. 문지기의 자유의지가 들어있다.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 세상앞에 믿음의 성도로서 살아가는 것은 ‘예수님을 보여주는 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삶의 문을 열면, 그 속에 주님이 계실 수 있도록, 소금과 빛의 삶을 살아야할 것이다. ‘꾸짖는’ 것은 없을 수 없으나, 그러한 거절을 당해도, 마음이 꺽일 이유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