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은혜를 받았다. 청와대에 초청받는 것도 영광스럽고, 백악관에 초청받는 것은 가문의 영광일 것이다. 하물며, 하나님의 집에 초대받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랴!! 초대(招待)는 부를 초(招) 기다릴 대(待)의 합성이다. 주님은 교회에서 우리를 부르시고, 기다리신다. 오늘도 말씀으로 주님을 만났다.
언젠가, 목사님이 양복 겉옷을 “확” 벗으신다. ‘더우신가?’라고 나는 생각했다. 걸어서 나오시더니, 요한복음 13장 4절 본문말씀을 읽으신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겉옷과 양복이 겹쳐서 보이는데, 보이는 사람을 통해 보이지 않는 주님은 말씀으로 함께 임재하신다. 교회는 주님의 집이다.
그때 설교 주제는 “인식의 존재”였다. 너무, 너무, 너무, 너무 중요한 말씀이며, 교육을 책임진 모든 사람들이 깊게 상고해야할 말씀이다. “인식의 틀”은 고정관념이나 안경과 같아서, 한번 쓰게 되면, 그것을 쉽게 벗을 수가 없다. 국적을 쉽게 바꾸지 못하듯 그렇다. 유물론도 신본주의도 자본주의도 맹자의 혁명철학도 모두 인식론에 해당된다.
2000년에 와인회사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이탈리아 와인을 수입하는 회사였는데, 와인 테스트 시간이 즐거웠다. 이태리 와인들은 상당히 고급인데, 300만원을 넘는 것들이 많았다. 와인창고를 내가 관리했는데, “숙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때 깊게 인식했다. 인생은 숙성해야한다. 숙성하지 않은 1년산 와인은 달콤하고, 쏘는 맛이 독특하다. 숙성된 와인은 10년, 20년, 30년까지 년도가 표시되고, 맛은 깊고 은은하다.
십자가를 통해 만들어진 예수님의 십자가 와인 말씀은 2천년이나 숙성되었다. 그 맛과 깊이와 향기는 어떤 철학으로도 따라갈 수가 없다. 단지, 그 와인의 맛이 사람을 통해 전달될 때, 사람의 것과 섞여서, 고유의 십자가 향기가 사라지는 것이 문제일 뿐, 십자가 신학은 2천년의 숙성을 가졌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요13:6)
예수님은 겉옷을 벗고, 수건을 둘렀다. 아!! 겉옷 대신에 수건을 두르시고, 세수대야를 들고 제자들의 발을 찾아갔다. 찾아가는 서비스다. 세수대야를 중앙에 놓고, 제자들에게 “나오라”고 하지 않으셨다. 세수대야를 들고, 제자들을 찾아가셨다. 그렇게 시몬 베드로에게 도착하셨다.
“이르시니”는 동음이의어다. 말로 ‘이르다’가 있고, 발로 ‘이르다’가 있다. 말로 “이르시니”처럼 읽힐 수도 있지만, 공동번역에는 “시몬 베드로의 차례가 되니”로 번역되었다. NIV도 “He came to Simon Peter”로 번역한다. 세수대야의 물을 닦고, 다시 떠서 또 닦고, 다시 떠서 또 닦고….. 예수님 혼자서 12제자 발, 24개의 발과 120개 발가락과 발톱을 모두 닦으셨다. 무좀있는 발도 있었으리라. 물을 떠서 씻고 닦는데 1인당 5분만 소요되어도, 60분이다. 엄청난 중노동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세족식을 행하셨다. 자신의 발도 씻지 않고, 제자들의 발을 모두 씻으신, 이런 예수님이 너무, 너무, 너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