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장창훈 기자]=역사(歷史)의 과거는 현재로 부활한다. 이때, 역사가는 현실에 위치하며, 역사가의 해석으로 역사는 현재로 재현된다. 이러한 묘미로 나는 역사를 좋아한다. 나는 설교집을 자주 꺼내서 읽는다. ‘롯과 교회 공동체’로 전해진 설교말씀을 오늘 다시 읽고, 밑줄도 치면서 깊게 묵상했다. 교회의 중요성을 다시 깨닫는다.
교회(敎會)는 에덴동산과 같다. 에덴동산은 산의 중턱에 위치한다. 산정상은 하나님이 거주하고, 산중턱은 에덴동산, 산기슭은 백성이 거주한다. 3단계로 구성된 성막의 개념이 이 시대로 재현되면, 교회는 에덴동산에 해당된다. (산정상-산중턱-산기슭, 지성소-성소-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골방에서 부른 것이 아니고, 공개적으로 선포했다는 의미다. 불교는 속세를 떠나 산에 불당을 짓고, 스님들이 승복을 입고서 공개적으로 부처를 전파한다.
그처럼, 아브라함은 가나안 지역사회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고, ‘선교활동’을 펼쳤다. 도시문화속에서 이방인처럼 아브라함이 전한 ‘그 하나님’이 바로 ‘산정상’이 된 것이다. 도시문화속에서 하나님을 부르는 신본주의로 살아낸 아브라함의 교회 공동체가 곧 그 시대 에덴동산이다. 세상문화와 타협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교회의 산에 살아가는 것은 도시문화를 거부하는 운동이 있어야한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고, 하늘의 음성을 듣고, 40일 금식기도를 했다. 그때 예수님께 나타난 것은 성령이 아니다. 마귀다. 마귀가 3번이나 나타나서 예수님께 예수님이 원하는 것을 제안했다. 배고플 때, 밥을 사주겠다고 하고, 힘없는 예수님께 부귀영화를 주겠다고 하고, 성경해석의 지혜를 주겠다고 했으나, 예수님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리고, 마귀가 떠났다. 마귀는 세상 것을 가지고 우리를 유혹한다. 40일 금식기도를 했어도 마귀는 유혹했다. 오직 하나님을 믿고,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이 ‘에덴동산’에 거주하는 것이다.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것은 교회 공동체를 버린 것이다. 아브라함이 목사로 있는 ‘믿음의 교회’를 롯이 떠난 것이다. 직장생활이 바빠지면서, 점점점 동쪽으로 거처를 옮기다가 결국 소돔의 도시로 들어가면서 교회에 거의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요즘은 지하철과 자동차가 있어서 거리가 멀어도 교회에 올 수 있지만, 그 시대에는 거리가 멀면, 교회에 올 수가 없다.
롯은 아브라함과 결별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찾지 못함으로 세상문화에 동화되었다. 세상문화에 동화되지 않으려면, 복음의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면서, 자기 자신을 교회로 만들어야한다. 교회는 말씀이 거하는 공간이다. 뇌속에 말씀이 머물고, 기도와 찬양으로 성령이 임재하게 해야한다. 수요일과 주일은 가능하면 교회에서 예배를 드려야한다. 세상은 갈수록 지능이 높아져서, 사람이 하나님을 멀리 하게 유혹한다. 세상쪽으로 가는 만큼 우리는 하나님과 멀어진다.
우리는 아담의 실수를 통해서,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불가능의 선악과’를 둘 필요가 있다. 아담은 선악과를 금지한 하나님의 말씀에 불만을 품고, 먹을 수 있는 나머지 열매에 대해 감사하지 못했다. 마음을 겸허하게 낮추면,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 넘쳐난다. 선악과를 금지한 하나님의 말씀처럼 금욕의 할례가 필요하다.
며칠 전, 교회 수련회를 다녀온 적이 있다. 롯은 소돔성의 도시에 거주하면서, 엄청난 사건을 경험하고, 아브라함은 산에 거주하니 별다른 사건이 없었다. 아브라함은 지역사회속에 있으면서도 하나님과 함께 거주했다. 날마다 같은 사건의 반복들이 진행됐다. 산속에 위치한 수련회 공간에 3일을 있었는데,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특별한 사건이 없었다. 그런데, 그곳이 천국이다. 세상 드라마가 아무리 재밌고, 흥미진진해도, 드라마가 복음은 아니다. 밋밋한 맛으로 우리에게 펼쳐진 복음이 우리 영혼을 살찌운다. 교회는 영혼의 맛집이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마태복음은 선언한다. 아브라함의 시대에 롯 사건이 나온다. 예수님께 ‘롯’은 누굴까? 작게는 세례요한 공동체일 수 있고, 크게는 유대교 공동체일 수 있다. 예수님은 사역의 마지막에 유대교 성전을 청소하시고, 희생양이 되어서 그들의 절기인 유월절에 어린양이 되어서 죽임을 당했다. 롯을 구한 아브라함처럼, 예수님은 그 시대를 구하기 위해서 대신 멸망의 심판을 받으셨다.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로 롯이 구출받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롯과 같은 제자 공동체와 유대교와 모든 시대가 구원받았다. 아브라함은 10명의 의인을 말했지만, 예수님때는 의인이 1명도 없었다. 제자 공동체도 모두 도망쳤고, 오직 예수님만 의인으로 희생양이 되신 것이다. 예루살렘이 곧 그 시대 소돔과 고모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