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장창훈 기자]=이웃사랑과 원수사랑은 전혀 다른데, 예수님은 둘을 같다고 말씀하신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예수님과 그 시대 다른 종교 지도자가 현격하게 달랐던 부분이 여기다. 바리새인과 에세네파와 사두개파는 모두 ‘이웃 사랑’에서 ‘이웃의 개념’을 축소했다.
반면, 예수님은 “이웃‘의 범주를 하나님적 차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은 3대만 거슬러 올라가도 서로 친척이며, 가족이다. 사돈의 8촌까지 따지면, 대한민국은 하나다. 역사를 추적하면, 대한민국과 일본은 같은 혈통이다. 지구공동체에 모든 국가는 뿌리가 하나이며, 원수가 없다.
레위기 19:18에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다. 예수님은 이 말씀에 대해 ‘성경해석’을 하셨다. 대부분 랍비들은 “원수”를 ‘유대민족 안에서’ 원수로 정의했다. 같은 민족끼리는 보복을 하지 말라고 해석하고, ‘이웃’도 동포로 국한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원수”를 “이웃”에 포함해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작게는 개인의 원수를, 크게는 민족의 원수인 로마를 사랑하라고 말씀한 것이다.
이웃의 개념을 축소하면, 한없이 작아지고, 결국 내분에 휩싸인다. 한국의 경우, 진보와 보수는 극단적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결코 화합할 수 없는 두 세계에 대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을까? 이웃의 범주를 우주까지 확장한 예수님의 관점은 ‘하나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태초에서 종말까지 시각을 확장한다면,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이다.
당시, 에세네파는 자신들에게만 하나님이 역사해서, 자신들에게만 구원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에세네파를 벗어나서는 구원이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그들은 정결주의로서 도덕적 금욕주의를 실천하고 있으니, 그러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돌아온 탕자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탕자에게 무한한 자비를 선포한다.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장자와 차자 모두를 사랑하신다. 거기에는 자식들의 도덕적 정결이 무의미한다. 아버지로서 자식을 무한히 사랑한 것이다. 하나님께는 인류가 모두 자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시각에서 원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