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으로서 마가복음 15장과 16장을 읽는 것은 상당히 부담스럽다. 대제사장들과 산헤드린 의원들은 당시 반란(민란)을 수습하려고, 예수님을 희생양으로 삼고, 반란의 수괴인 바라바를 구출하고, 이러한 계획을 위해서 여론을 조작했다. 법정에서 목소리가 큰 사람들을 동원해서 빌라도의 마음을 혼동시킨 것이다. 드루킹과 같은 인물이 실검 순서를 조작하듯이 그렇게 했다. 예수님은 그러한 여론조작에 영향을 받지 않고, 운명처럼 그들의 손에 이끌려 재판을 받고, 그렇게 죽임을 당하셨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씨뿌리는 비유가 나온다. 천국은 씨뿌리는 자와 같아서, 길가밭과 돌짝밭과 가시밭에 뿌린 씨는 대항하지 않고 죽는다. 그처럼 예수님은 그 시대의 권력자들의 밭에 뿌려져서 죽임을 당하셨다. 천국의 씨는 옥토밭에만 뿌려지지 않고, 돌짝밭과 길가밭과 가시밭에도 뿌려져서, 죽게 된다. 십자가 사건은 그렇게 운명처럼 마침표를 찍는다. 그리고, 무덤속에 계시다가 부활하셨다. 부활이 없다면, 십자가의 죽음도 헛될 것이다. 길가밭과 돌짝밭과 가시밭에 뿌려진 씨는 죽었으나, 그 중에서 옥토밭이 있어서 씨는 열매를 맺는다. 이것이 천국이다.
서슬 시퍼런 권력의 횡포속에서도 여인들은 십자가 곁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을 지켰다.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는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또 무덤을 찾았다. 이들은 옥토밭과 같아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씨앗이 되어서,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 천국은 권력앞에 죽임을 당하여도, 죽임을 당한 예수님의 사역이 누군가에게는 씨앗이 되어서 복음의 결실을 맺는다.
운명처럼, 수동형으로 끌려가는 상황에 처할지라도, 손해보는 것처럼 억울해도, 인생은 그렇게 사는 것이다.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인생은 주어진 상황에서 성령에 이끌려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살다보면 좋은 날이 온다.
예수님은 침묵하셨다. 침묵하는 예수님께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의원들과 백성들이 말하기 시작한다. 광풍처럼 그들은 휘몰아친다. 그러나, 말씀이신 예수님은 침묵으로 말하고,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면서, 휘장이 찢어졌다. 그리고, 살인을 집행한 백부장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다.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막16:39)
‘그렇게 숨지심’은 어떠한 모습을 말할까? 인생의 마지막은 과연 어떻해야 할까? 생각이 깊어진다.
누가복음 23장에 따르면, 백부장이 목격한 것은 낮 12~오후3시까지 되어진 일들이다. 해가 빛을 잃고,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면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모습을 본 백부장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해달별이 추락하는 죽음앞에서 하나님께 영혼을 의탁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서, 백부장은 예수님을 새롭게 깨달은 것이다. ‘그렇게 숨지심’은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