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학적(類型學的)은 거푸집(型)의 종류를 따라서 성경을 읽는 것이다. 가장 기본이 되는 거푸집은 창세기 2장과 3장이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다. 하나님의 프로젝트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서 완성되었다. 또한, 에덴동산에서 가장 기본적인 인류창조 역사가 있었는데, 뱀이 끼어들면서 그 역사가 깨졌다. 에덴동산은 그때부터 계속 반복되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 땅에 재현된다.
에덴동산에는 아담과 하와가 있었다. 작은 동산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위해 허락한 곳이다. 아담의 에덴동산은 홍수심판을 통해서 노아의 포도원으로 대치된다. 아담때는 뱀이 출현해서, 에덴동산을 침략했다면, 노아때는 ‘함’이 뱀이 되어서 침략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뱀을 저주했고, 노아는 함을 저주했다. 함을 저주한 것은 그러한 유형학적 흐름이 있어서 그렇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 그곳을 떠나서 하나님이 허락한 약속의 가나안에 들어갔다. 아브라함이 새로운 아담이 되어서 새로운 에덴동산으로 가나안을 허락받은 것이다. 사라는 새로운 하와이다. 그곳에는 가나안의 후손이 있었으니, 토착민들이 뱀의 족속이다. 그곳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고 그 약속을 받았다.
이후, 이삭은 번제사건 이후에 아내 리브가를 얻는다. 엘르에셀은 밧단아람의 우물가에서 리브가를 만났다. 리브가는 새로운 하와로서 등장하며, 리브가는 엘르에셀을 따라서 가나안으로 왔는데, 석양이 지는 들판에서 이삭을 보게 된다. 두 남녀의 로멘스는 곧 아담과 하와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아담의 독처를 좋지 않게 생각해서 아내를 데려와서 결혼을 시켰다. 그처럼, 리브가를 데려와서 새로운 아담인 이삭의 결혼을 하나님이 허락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이다.
이후 이삭은 야곱과 에서를 축복하는데, 에서의 이름으로 축복기도를 받은 야곱을 축복하고, 야곱은 도망자 신세가 된다. 야곱은 밧단아람으로 가는데, 그곳에서 우물가에서 라헬을 만난다. 이것은 우물가에서 만난 리브가와 연결되고, 에덴동산의 하와를 연상시킨다. 즉, 야곱이 새로운 아담으로 창세기에 등장하는 것이다. 새로운 아담인 야곱은 신부집으로 도망자로 들어간다. 데릴사위제로 14년을 봉사하면서 두 아내를 얻게 된다.
모세도 이집트 왕궁에서 쫓겨나서 미디안 광야에서 도망자로 있었을 때, 우물가에서 십보라를 만난다. 십보라가 곧 새로운 하와이며, 새로운 라헬이다. 모세는 새로운 야곱으로서, 민족의 영도자로 택정을 받은 것이다. 성경은 유형학적 문법을 통해서 닮은 꼴로 사람의 인물과 사건을 묘사한다. 닮은 꼴을 자세히 관찰하고, 상고하면서 그 속에 숨겨진 깊은 묵시를 발견할 수 있어야한다.
요한복음 4장에서도 야곱의 우물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다. 요한복음 기자가 ‘야곱의 우물’을 거론한 이유는 예수님을 새로운 야곱으로 등장하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이 새로운 야곱이면, 사마리아 여인은 새로운 라헬이 된다. 야곱의 우물은 말씀으로 대체된다.
이 시대에 우리는 성경을 지식의 책으로 생각한다. 모든 세상의 지식은 목이 마른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 오직, 복음의 말씀이 영혼의 기갈을 해결할 수 있다. 영적인 가뭄 시대에 복음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복음을 날마다 묵상하면, 그곳에서 예수님을 남편으로 만나면, 누구든지 어린양의 신부가 될 수 있다. 오직 예수님이 어린양이며, 참된 남편이며, 마지막 아담으로서 인류의 영원한 구원주이다. 이것을 믿어야한다.
마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이 박혔다. 그때 여인들이 십자가 사건을 지켜봤다고 기록된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창세기 3장을 떠올려야한다. 죄문제는 창세기 3장에 거론된다. 아담은 자신이 지은 범죄를 하와에게 떠넘겼고, 하와는 뱀에게 떠넘겼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들의 죄, 그 백성의 죄, 그 시대의 죄를 모두 짊어지고서 죄값을 청산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지막 아담인 것이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으나, 예수님은 죄값을 청산하시고, 무덤속에서 부활하신 후, 믿는 자에게 ‘생명나무’가 되셨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나무이며, 주님을 믿는 자마다 새로운 하와로서 에덴동산에 거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