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성경읽기 – 성령에 이끌려
성경은 ‘자유’를 ‘성령의 속박’으로 정의한다. 성령에 이끌려 살지 못하면, 그것은 ‘귀신’에 붙잡혀 살아가는 것이다. 스스로 귀신에 붙잡혀 살지 않는다고 믿어도, ‘자신’이라는 귀신에 붙잡혀 살아간다. 성령에 붙잡혀야, 성령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즉, 지구의 중력에 붙잡혀야, 지구위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중력을 떠나면, 진공상태에서 자유를 잃는다.
오늘은 8월 16일, 마가복음 1장을 읽었다. 나는 마가복음을 1일에 1장, 2일에 2장, 15일에는 15장과 16장을 읽고, 16일에는 다시 1장을 읽는다. 마가복음 1장에는 ‘자유의 속성’이 나타난다. 예수님의 활동범위를 보면, 세례요한에게 갔다가 그곳을 떠나고, 성령에 이끌려서 유대광야로 갔다가 그곳을 떠나고, 가버나움에 들어갔다가 그곳을 떠나고, 베드로의 집에 들어갔다가 그곳을 떠난다. 들어감과 떠남을 계속 반복하신다. 공간에 묶이지 않으시는 예수님이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씀은 ‘거주의 자유’로 해석할 수도 있다.
복음서를 읽을 때는 복음서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야한다. 그리고, 현실로 들어왔다가 다시 현실을 떠나야한다. 자신의 내면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떠나야한다. 복음과 현실의 무대를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성경속 예수님의 활동을 볼 수 있어야한다. 예수님이 베드로 장모에게 문병을 가듯이, 지금 ‘자신’에게 올 수 있다. 마가복음 16장에서 역사적 예수님은 부활해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 그러므로, 복음서를 읽는 이 순간 예수님은 나를, 우리를 보고 계신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막1:15)
주님은 각 개인에게 ‘회개와 믿음’을 요구하신다. 특히,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신다. 복음을 믿기 위해서는 먼저 복음을 읽어야한다. 복음을 읽기 위해서는 스스로 복음앞에 서야한다. 한국의 대형교회와 이단교회는 단상의 목사 없이는 성도들이 주체적으로 복음을 읽을 수 없도록 ‘길들여진’ 신앙을 하고 있다. 그래서 부자세습의 비진리가 교회내에서 행해졌는데도 모두 동의한 것이다.
‘멸망받을 미운 물건’이 거룩한 곳에 섰음에도, 성도들은 ‘미운 물건’을 ‘좋은 물건’으로 착각한다. 영적 소경이 된 것이다. 성도들은 성령으로 깨어나서, 교회와 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어야한다. 교회와 사회에 멸망의 미운 물건들이 있는지, 성령의 열매들이 있는지…. 교회가 세상을 위해 기도해야하는데, 요즘은 세상이 교회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막1:35)
오!! 얼마나 아름다운 복음의 문장인가!!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가서 귀신들을 몰아내고,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치료하고, 그 동네의 아픈 환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시고, 쉴 틈 없이 강행군을 하신 다음, 잠시 눈을 붙이신 예수님은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여명의 새벽에 새벽별처럼 일어나서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기도의 삶을 사셨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막1:13)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쫓아내셨다. 성령께서 행하시면, 어떤 환란이 일어나도 감사할 일이다. 야곱은 형의 미움을 받고 광야로 쫓겨났다. 형의 미움을 받고 그렇게 한 것 같지만, 성령께서 상황과 여건을 틀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이것을 믿어야한다. 이집트 궁궐의 편안한 향락을 버리고 미디안 광야로 내쫓긴 모세의 삶도 결국 성령께서 쫓아내신 것이다. 성령께서 모세를 이집트 궁궐로 보내셨고, 성령께서 그 모세를 궁궐에서 내쫓아 광야로 가게 하셨다.
그처럼, 성령께서 예수님을 세례요한에게 보내서 세례를 받게 하셨고, 그곳을 떠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게 하셨고, 갈릴리 해변으로 보내서 전도하게 하셨다. 성령이 예수님을 이곳으로, 저곳으로 보내신다. 우리도, 이제는 성령의 네비게이션을 따라 살아야할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