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에서 밥은 리필이 없다.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한다. 스타벅스와 베네까페는 ‘리필’ 자체가 없다. 새롭게 아메리카노 비용을 지불해야한다. 단골도 예외는 없다. ‘생명의 물’로 자신을 소개한 주님의 까페에서는 ‘무한리필’이다. 복음의 샘물은 날마다, 매순간 리필이 가능하다. 오늘 나는 마가복음 1장 말씀을 5잔이나 마셨다. 마실 때마다 그 오묘한 맛이 나를 새롭게 한다. 말씀이 읽히는 것은 성령이 오신 것이며, 예수님이 말씀하심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모습으로 변형된다. 마가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다른 모양으로 변형되어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다. 오늘, 지금, 예수님은 바람으로, 말씀으로, 사건으로, 생각으로, 지인(知人)으로, 불편한 이방인으로, 돌발변수로, 우리에게 나타나신다. 엠마오로 낙향하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그들의 방향을 정반대로 바꾸셨다. 그들은 엠마오로 방향을 정했지만, 다시 예루살렘으로 방향을 바꾸고 왔던 길을 돌아갔다. ‘왔던 길’로 돌아가듯, 우리는 말씀으로 돌아가야한다.
‘부활’(復活)은 다시 부(復 ) 생활 활(活)이다. 다시 살아나서, 같은 일을 다르게 반복하는 것이 부활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살아서 했던 일을 다르게 하셨다. 살아서 하신 그 복음의 사역을 제자들과 함께 행하셨다. 성령으로 행하신 복음의 사역이 예수님과 함께 다시 진행된다. 인생은 ‘부활’해야한다. 했던 일을 다시 새롭게 해야한다.
무의미한 연명치료는 중단되어야한다. 베드로와 요한은 무의미한 그물에 붙잡혀서 살았다. 갈릴리 호수에 갇힌 물고기처럼, 그물에 갇혀서 살았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말씀’을 전했다. 복음의 말씀이 떨어지면, 창세기 1장처럼 새로운 창조사역이 시작된다. 창세기 1장은 7단계에 걸쳐서 창조사역이 진행된다. 그처럼, 복음의 말씀이 사람에게 임하면, 점점점 변화한다. 그 변화의 주체는 ‘성령’이다.
마가복음 1장의 시작은 ‘세례요한’이다. 세례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받았다. 그리고, 예수님께 세례를 주고, 요한은 옥에 붙잡혔다. 하나님께서 부여한 그 사명을 완수한 세례요한이다. 어떤 종교단체는 세례요한이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미련한 주장이다. 세례요한은 사명을 완수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명이 곧 세례요한의 사명이며, 세례요한은 그렇게 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16장 19절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고 했지만, 20절에서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라고 했다. 주님은 제자들의 복음전파 현장에 함께 계신다. 세례를 받고, 주님은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고, 갈릴리 해변을 거닐다가 베드로와 요한을 전도하고, 가버나움 도시에 들어가서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셨고,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서 열병으로 앓아누운 장모의 병을 고치셨다.
예수님은 ‘사람이 사는 집’에 들어와서, 그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지금,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이것이 복음을 묵상하고, 복음으로 살아가는 특혜(特惠)다. 특별한 은혜는 복음의 말씀으로 주어진다. 무한리필되는 복음의 아메리카노는 내 삶을 출렁이게 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