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장창훈 기자]=과거에 다녔던 교회의 성경 프로그램에 ‘창조목적과 타락론’이라는 과목이 있었다. 창조목적은 창세기 2장, 타락론은 창세기 3장에 대한 풀이다. 그 과목은 유전학(DNA)와 남녀의 사랑을 절묘하게 결합해서, 10대 청소년인 아담과 하와가 육체결합의 타락을 했다는 내용이다. 그때는 그 해석이 탁월하게 보였다. 마치 뱀의 해석을 들은 하와에게 선악과가 ‘지혜롭게 보암직하게 보였듯’ 나는 그 해석의 지식을 섭취했다.
8개월 해독기간을 거치고 나니, 아담과 하와는 이미 결혼했던 사이였는데, ‘합방금지’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고,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어찌 해석될지, 그것도 납득되지 않는다. 선악과를 여자 지체로, 생명나무를 남자 자체로 해석하는 것은 너무 억지해석이다. 그렇다면, 창조목적은 무엇일까?
이단들은 4위 기대론을 가르친다. 아담과 하와는 부모요, 아벨과 가인은 자식이다.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신다. 그 하나님의 자리에 ‘뱀’(사탄)이 차지하면서, 지상천국이 지상지옥이 되었다면서, 뱀의 자리에 ‘교주’가 대체한다. 그런데, 교주가 과연 하나님인가? 교주도 결국 뱀의 후예일 뿐이다. 지상천국을 말하지만, 지상지옥이 될 수밖에 없는 교리인 것이다.
인생의 창조목적이 너무 거대하면, 하루의 생활목적은 무엇인가? 이단들이 말했듯, 하나님을 중심해서 사는 것이다. 그들은 부분적으로 진리를 말하고, 진리의 핵심을 왜곡한다. 하나님 자리에 ‘뱀’이 차지했다고 하면서, 뱀의 자리에 자신들이 차지한다. 그 자리에 ‘하나님’을 둬야한다. 이것이 인생의 창조목적이다.
하루를 살아보니, 밥먹고, TV보고, 독서하고, 산책하고, 운동하고, 뉴스보고, 잡생각에 빠지고, 카톡보고, 메일확인하고….. 그렇게 하루가 흘러간다. 성경보는 시간은 쥐꼬리에 불과하고, 기도시간도 새발의 피다. 찬양시간도 인색하다. 이것이 보편적 인생의 하루다. 우리는 결국 죽을 것인데, 왜 영혼의 생명보험과 같은 ‘복음’(福音)에 전념하지 못할까? 뱀의 유혹에 빠져서 그렇다.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음성과 성령의 비둘기가 예수님께 임재했다. 그때, 성령은 예수님을 유대광야로 내쫓았다. 빈들에 있는 예수님께 ‘떡’이 놓였다. 이게 웬떡인가? 홀로 있던 예수님께 권력이 놓였다. 이게 웬 권력인가?
만약, 예수님께서 마귀의 제안을 받아드렸다면, 복음사역의 3년중에서 대부분이 세상을 위해 쓰였을 것이다. 성령이 임하면 세상 것이 쓰레기처럼 하잖게 보이고, 뱀의 유혹에 빠지면 세상 것이 지혜롭고 탐스럽게 보인다. 예수님은 마귀의 제안을 단호히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을 목적으로 살았다. 인생의 창조목적, 과연 무엇일까?
나는 오늘도 마가복음 6장을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