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본주의(神本主義)는 신을 근본으로 하는 주의이며, 인본주의(人本主義)는 사람을 근본으로 하는 주의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신본주의인가? 인본주의인가? 신본주의는 단지 언어이고, 인본주의도 언어이다. 신본주의가 정의가 될 수 없고, 진리도 아니며, 인본주의도 역시 그러함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한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중심하며 성령의 감동에 따라 공동체 생활을 해야한다.
성도가 성도와 교통하는 것은 사람끼리 살아가는 인격의 삶이다. 인본주의가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성도가 성도와 만나서 서로 교감하는 감정조차 인본주의로 매도된다면, 교회의 존재방식은 무엇인가? 신본주의(神本主義)와 인본주의(人本主義)를 사용하는 교회마다 언어에 의한 판단의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할 것이다. 인본주의의 단어속에 모든 사람이 담길 수 없듯, 신본주의 단어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 신본주의는 결코 진리가 아니다.
교회가 신본주의를 외칠 때, 이단교회가 신의 이름을 외칠 때, 그 교리와 계시를 전달하는 자는 사람이다. 신본주의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신본주의는 이미 사람의 형식에 속함을 우리는 알아야한다. 사람은 누구도 ‘신본주의’를 정의할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이 ‘신본주의’를 정의하면, 그 신본주의는 ‘그 사람이 정의한 신본주의’로서, 인간적 신본주의다. 결국, 신본주의는 언어에 의한 정의일 뿐이다.
인본주의가 신본주의 반대개념으로 사용되는데, 과연 그러한가? 신본주의가 선(善)이고, 인본주의는 악(惡)처럼 정의될 때가 많다. 그러나, 예수님은 복음서 곳곳에서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치시고, 10대 소녀의 죽음을 외면하지 않으셨고, 군대귀신 들린 자의 신음을 듣고, 그 귀신을 물리쳤다. 사람을 중심해서, 사람이 사는 도시에서 주님은 복음을 외치셨다.
신본주의(神本主義)는 하나님을 근본으로 삼는 주의인데, 교회마다 신본주의를 외치면서 무엇을 하는가? 하나님이 원하는 신본주의를 하는 자들이 몇 명이나 있을까? 성경적 신본주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로 정의된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모든 사건과 사람을 재해석하는 것이 진정한 신본주의다. 막연히 사람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중심하는 것이 신본주의가 아니다.
창세기 3장에서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 “하나님처럼 되는 것”을 말했다. 사람이 신적 권능을 갖고, 하나님처럼 높아지고, 하나님을 중심해서 살아가는 것은 모든 사람의 희망사항이다. 영생을 얻고 싶은 것은 모든 인간의 보편적 심리다. 뱀의 유혹을 듣고,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받지 못했다. 뱀이 말하는 신본주의는 거짓임이 판명됐다.
예수님은 철저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서 육체로서 살아가셨다. 육체로서 말씀을 외치고, 행하고, 복음의 사역을 완성하고, 그 몸을 거룩한 제사로서 인류에게 내어주신 분이 예수님이다. 부활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역시 음식을 잡수셨고, 디베랴 호수에서도 제자들과 함께 조반을 드셨다. 예수님은 철저히 사람을 중심해서 교회공동체 사역을 펼치셨다. 이것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신본주의를 빌미로, 종교권력이 신을 독점하는 것이 곧 지식의 우상숭배다. 이단들이 특히 이러한 권력을 휘두르고, 기존 종교권력도 예외는 아니다. 중세사회는 신의 이름으로 ‘우상숭배의 권력’이 지배했던 암흑기였다. 사람이 사람다움의 인간미를 상실한다면, 사람이 감정이 없다면, 그 속에 어찌 성령이 머물수 있으랴!!
오직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의 생명을 처단했던 중세사회의 마녀사냥은 과연 그리스도의 복음일까? 하나님을 빙자한 마귀의 권력이요, 진리가 실종된 시대였다. 모든 시대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따뜻한 인간미가 풍겨야한다. 예수님은 복음서 곳곳에서 사람의 사연을 외면하지 않았다. 유월절 때에도 제자들과 식사를 미리 예약하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하나님의 신비앞에 겸허히 묻고 성찰하면서 마지막 질문을 던지셨다. 인간본질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과 고뇌가 없다면, 신본주의의 족쇄에 묶인 ‘지식권력’의 귀신들린 자가 될 수도 있다.
신본주의는 하나님이 자신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대를 진정 알고 계시는가? ‘앎’은 곧 하나님과 인격적 교감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람의 인격으로 아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신격으로 아시며, 예수님은 인격과 신격을 모두 갖추신 분이므로, 예수님의 중보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날마다 알아간다. 이것인 신본주의며, 인본주의다. 신본주의도 인본주의도 진리가 아니다. 오직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복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