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4:15~16]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이사야 9:1~2]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마태복음에 인용된 이사야서 9장 예언이다. 마태는 ‘9장 1절’을 압축해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만 남겼고, 바로 2절을 이어서 붙였다. 가버나움을 둘러싼 ‘스불론과 납달리의 해변’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깊은 어둠에 속했던 식민지 국가 이스라엘의 척박한 갈릴리 지역에 ‘예수님의 복음’이 비친 것이다. 내게도 그러했다. 중년의 나이, 48세에 예수님의 복음이 비치었다. 아멘!!
선지자 중에서 왕께 직언하고, 목숨을 걸고 항쟁한 인물이 엘리야다. 엘리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을 떠나자, 비가 그쳤다. 농경사회에서 가뭄은 경제몰락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릿 시냇가로 옮겼고, 까마귀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엘리야를 공궤했다. 하나님의 빛이 ‘까마귀같은 이방민족’에게 비친 것이다. 그리고, 그 시대 우상의 소굴인 사르밧으로 거처를 옮겼다. 엘리야를 통한 말씀의 빛이 시돈성의 사르밧 과부에게 임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본 것이다. 남편을 잃고, 살 길이 막막했던 그녀에게 복음은 희망이 되었다. 사르밧 과부처럼, 내게 복음은 새로운 희망이다.
3년간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랐고, 유월절 성만찬식에서도 충성맹세를 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가룟 유다가 침략하자, 모두 도망쳤고, 베드로는 예수님이 붙잡힌 곳까지 갔으나, 계집종의 물음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스승을 외면한 그 비겁함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도 씻겨지지 않았다. 베드로는 디베랴 호수로 낙향했다. 낙망과 슬픔과 사망에 속한 베드로의 심령가운데, 주님은 다시 찾아와 ‘큰 빛’이 되셨다. 주님만이 죽은 심령을 일으키신다.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출2:24)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히브리 민족의 고통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으셨다. 하나님께서 ‘기억하신 것’이 곧 그들에게 구원의 빛이 되었다. 하나님의 기억이 모세를 양육하고 연단해서 그들에게 구원주로 보내게 하셨다. 하나님이 기억해야, 인생은 구원을 받는다. 하나님은 나를 기억하셨고, 내게 복음의 빛을 다시 비치셨다. 아멘!!
나는, 우리는 죄의 사망에 갇힌 아담의 후예들이고, 뱀의 독을 물려받은 족속이다. 피는 피로 이어져, 세상 것들에 쉽게 흥분하는 속물근성이 우리에게 있다. 죄로 얼룩진 나에게, 우리에게, 의로운 해를 비추사, 새로운 생명을 주셨으니, 구원의 능력은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