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의 이신칭의(以信稱義)와 관계적 상속관계
[서울교육방송 드라마 비평]=의사 요한은 ‘존엄사’와 ‘연명의료법’에 대해 본질을 드러낸다. 간접살인자로 의사를 기소하는 검사, 환자의 고통을 위해 환자의 결정권에 따르는 의사, 모두 생명과 죽음 판단한다. 죽을 수 있는 권리, 과연 환자에게 있을까?
검사는 짜여진 각본속에 의사 요한을 밀어 넣었다. 의사 요한은 꼼짝없이 검사의 함정에 빠졌고, 호흡기가 제거된 현장에 의사 요한이 걸려 들었다. 그는 자신이 호흡기를 빼지 않았다고 말할 뿐, 자세한 상황은 설명하지 않는다. 병원은 발칵 뒤집혔다.
검사가 의사 차요한에게 묻는다. “왜, 옥상에 올라갔죠?”
“옥상에서 자살을 시도한 그 환자가 있던 곳을 보려구요.”
“가서 뭘 했죠?”
“하늘을 올려봤어요.”
“그리고 또 뭘 했죠?”
“땅을 내려다 봤어요”
“그래서 뭘 봤습니까?”
“뛰어내리기 직전 그 환자를 봤습니다.”
인생은, 사람은, 누구나 이렇다. 하늘을 올려보고, 땅을 내려보고, 그리고, 인생은 언젠가 땅을 떠나야한다. 누가 등을 떠밀지 않아도, 옥상에서 뛰어내리지 않아도, 언젠가 땅을 떠나야한다. 가야할 하늘과 걸어온 땅이 있을 뿐이다. 현실의 고통은 옥상에서 뛰어내릴 정도로 모두 끔찍하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의사 요한은 고통을 느낄 수 없는 무통각증 환자다. 그는 이명(耳鳴)의 고통에 시달리면서, 의사로서 삶을 포기할 상황에 놓였다. 요한을 사랑하는 제자 강시영이 조심스럽게 의사 요한의 병증을 묻는다.
“결과는 나왔나요? 아무 문제가 없다면, 고개를 끄떡여요”
차요한은 그대로 있는다.
“병은 있지만, 나을 수 있다면, 고개를 끄떡여 줘요”
차요한은 그대로 있는다.
표정이 점점 굳어진, 강시영은…..
“병이 깊고, 고칠 수 없다면…..” 말을 멈춘다.
차요한이 묻는다.
“내가 어떻게 해줄까?”
“나를 위로해주세요”
“아픈 것은 나인데, 왜 너를 위로해야하지?”
“그런 교수님을 잃게 될 사람은 저예요. 저를 위로해줘요”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과 그 고통을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다.
마태복음 567장은 산상수훈이다. 5장 3~10절까지 8복이 나온다. 3절에서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다”고 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예수님이고, 곧 천국이다. 심령이 가난하신 예수님은 천국의 주인이며, 그 천국을 ‘그들’에게 주심으로 가난해지셨다.
8절에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고 했다. 마음이 청결하면,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청결하신 예수님이 하나님을 비추는 거울이 되심으로, 그들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보게 된 것이다. 이것이 관계적 천국이다. 차요한의 고통에 대해, 강시영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고통’에 빠진다. 예수님의 의로움이 믿는 자들에게 상속된다. 이것이 이신칭의(以信稱義)다.
9절에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했다. 화평하게 하면, 평화주의자는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사람을 화평하게 하려고, 심판을 받으셨다. 주님이 하나님과 사람들을 화평케 하셔서, 주님으로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다.
5절에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했다. 사람들은 온유하면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착각한다. 아니다. 주님이 온유하심으로 약속의 땅이 되셨고, 그 땅을 믿는 자에게 상속했다. 주님이 곧 ‘땅’이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한다. 차요한의 극심한 고통에 대해 강시영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또 다른 고통’을 겪는다. 사랑은 관계적 상속이 발생한다. 이것이 주님의 의(義)가 믿는 자에게 상속되는 사랑의 이신칭의(以信稱義)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