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위치에너지를 낮은 운동에너지로 변환하자!!
[서울교육방송 장창훈 기자]=십자가의 개념은 이순신 장군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은 일본의 침략을 막아냈지만, 시기와 질투를 받으면서 그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투옥당했다. 군대사령관의 직위에서 해제되었다. 백의종군(白衣從軍)은 병졸로서 전쟁에 참여한 것이다. 높고자 하는 자는 낮아져야한다는 주님의 말씀은 곧 직급을 벗고, 낮은 곳에 위치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족식에서 실제로 ‘겉옷’을 벗고, ‘수건’을 두르고, 제자들이 발을 씻겼다. 겉옷은 ‘왕의 신분’이고, 수건은 ‘종의 신분’이다.
위치에너지는 높은 곳과 낮은 곳의 차이가 있다. 1kg이 10m에서는 9.8J의 위치에너지를 갖는다. (E=9.8mh) 10m 높이에 있는 물체가 땅에 떨어지면, 위치에너지는 사라지고, 대신에 운동에너지가 발생한다. 높은 곳에 있는 자가 낮아지면서, 섬김의 운동에너지로 변환되는 것이다. 섬김을 받는 자는 높은 곳에 위치하고, 섬기는 자는 낮은 곳에 위치한다. 위치에너지와 운동에너지는 공존하지 못한다.
부자청년 이야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단면은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라’고 한 것이다. 베드로와 제자들에게는 그물을 버려두라고 했지, 그물을 나눠주라고 하지는 않았다. 재물이 없으니, 주변에 나눠줄 수도 없는 것이다. 반면, 부자청년은 가진 것이 많았다. 가진 것이 많다는 것은 재물의 위치 에너지가 높다는 것이다. 재물을 버리면, 재물의 위치에너지가 낮아지면, 그만큼 ‘나눔’의 운동에너지가 발생할 수 있다. 그때, 하늘에서 보화가 내려오고, 주님을 따를 수 있다. 이것이 ‘성령의 임재’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3장에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임했다. 갈릴리의 높은 곳에서 요단강의 낮은 곳으로 임했고, 섬김을 받을 주님께서 섬기는 종으로 세례를 받았다. 성령을 베푸시는 주님께서 세례요한을 통해 물세례를 받은 것이다. 그때, 성령이 임재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 주님께서 낮아지심으로 성령이 주님을 통해서 드러나고, 말씀이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천국의 신비다. 세례요한은 자신이 세례를 베풀자,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렸다고 착각할 수 있다. 자신의 세례를 통해서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한 것이다. 성경의 전체적 맥락은 주님의 낮아지심이 성령으로, 말씀으로 드러난 것이다.
왕이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대속물이 되셨다. 심판주가 제물이 된 것이다. 이것이 위치에너지가 운동에너지로 변환되는 대속적 그리스도이다. 군림의 권력이 섬김의 자유로 변환될 때, 죄에서 해방될 수 있다. 제자들 중에서 영의정과 좌의정에 앉게 해달라고 친인척 청탁을 한 자가 있었다. 인사청탁인데, 야고보와 요한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했다. 높은 곳에 있길 원하면, 가장 낮은 바닥까지 떨어져야한다. 바닥까지 떨어진 예수님은 다시 탄성력으로 하늘까지 높아져,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 이것이 부활이다. 부활은 바닥에서 탄성력으로 가능하다.
[막16:19] 주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십자가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며, 낮아짐은 낮아짐 자체가 높아짐이다. 하늘로 올려지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 이보다 높은 위치가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그 위치는 세상적으로 높은 것이 아니다. 세상적으로 지극히 낮은 바닥의 십자가이다. 밑바닥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늘로 올려지신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그 자체가 영광에 이르는 유일한 좁은 문인 것이다.
가진 것이 많은가? 높은 곳에 있는가? 오!! 그 위치에너지로서 운동에너지로 변환하라!! 천국에 들어갈 기회가 있으니, 재물과 권력을 나눠주고,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듯, 천국에 들어가자. 천국은 위치에너지가 운동에너지로 변환될 때 들어갈 수 있음을 인지하자.
[행6:2]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재정출납)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12사도가 성도들끼리 분쟁이 발생하자, 자신들의 권력을 내려놓는 장면이다. 12사도는 재정권한을 일곱 집사에게 위임하고, 기도와 말씀사역에만 전념한다. 기도와 말씀사역은 ‘영적 성전기능’을 뜻한다. 세상적 권력, 세상적 재물을 내려놓지 않으면, 그 위치에너지는 계속 그대로 유지된다. 내려놓을 때, 다른 누군가는 그것을 맡게 된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대신 감당했고, 제자들이 십자가를 지고 밀알이 됨으로 복음의 상속이 후대로 이어졌다.
기독교 복음은 ‘상속자 찾기’에 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모든 의(義)를 12사도에게 상속했다. 그 중에 가룟유다는 상속을 포기하고, 자기 길로 행했다. 우리는 주님의 의(義)를 상속함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주님의 은혜를 경홀히 여기면 안될 것이다. 십자가를 통한 이신칭의(以信稱義) 은혜는 값없이 주어졌고, 자격없는 자에게 주어졌고, 어떤 댓가도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보답을 전제한 은혜임을 간과하지 말자!! 부모의 은혜를 망각한 자는 불효자식이다. 하물며 십자가의 은혜를 업신여기는 자는 어떻겠는가!!
왕의 혼인잔치에 값없이 초대를 받았으나,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결국 쫓겨났다. 그 예복이 무엇일까? 주님의 의(義)요, 은혜를 은혜로 받아드리는 감사일 것이다. 1만 달란트의 탕감을 받은 신하가 100 데나리온 빚을 받으려고 하자, 왕은 1만 달란트 탕감을 취소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탕감해주셨고, 탕감의 단서조항이 있다. 형제들의 죄를 용서함으로 ‘보답’을 받길 원하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주어졌으나, 보답이 없는 것이 아니다. 부모는 자식들끼리 화목하길 바라듯, 하나님은 사람들끼리 서로 용서하고 화목하길 원하신다. 교회 공동체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먼저요, 세상을 향한 긍휼과 자비로서 그들의 죄를 대신 회개하는 것이 또한 사랑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보답하는 길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을 망각하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