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마가복음 11장을 읽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1장, 마가복음 11장에서 각각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마가복음 11장에서는 어린 나귀를 타고 “호산나 찬송”의 영광을 받으시며, 새 시대의 문을 여신다. 어린 나귀는 스가랴서 9:9에 나온 예언이다.
[슥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막11:2]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고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했으니” 주님이 영광의 왕, 스가랴의 예언을 이룬 왕으로 해석하면, 그것은 단무지 해석이다. 주님은 나귀새끼에게 구원을 베푸시려고, ‘매여있는 것’을 풀어서 데려오셨다. 그리고, 나귀새끼에게 겉옷을 올리셨다. 이것이 바로 묶인 나귀새끼를 구원하시는 주님의 은혜다.
[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주님은 나귀새끼를 그 묶인 곳에서 풀어서 데려오듯, 그 백성을 백성의 죄에서 풀어서 구원하신다. 죄로부터 해방은 각 개인에게 임한다. 그 나귀새끼를 묶었던 끈에서 해방되듯 그렇다. 주님의 구원사역은 나귀새끼를 풀면서, 당신은 어린양이 되어 묶이신다. 나귀새끼에게 겉옷의 은혜를 주시려고, 당신은 옷이 벗겨지신다. 나귀새끼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당신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다. 구원주는 구원받을 자의 대속물이다.
나는, 우리는 주님의 겸손한 나귀새끼가 되어야한다. 주님이 묶임으로 나귀새끼는 풀림을 받았고, 주님이 죄인으로 죽임을 당함으로 나귀새끼는 영광의 찬송을 받았다. 살육당한 어린양은 부활하신 주님이니, 이제 그의 지배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
예루살렘 입성때 소품으로 사용된 그 어린 나귀는 주인에게 돌려줬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로 구출받은 사도들과 제자공동체와 지금 우리는 죄의 속박에 돌아갈 이유가 없다. 십자가 사건이 실제상황이듯, 우리의 풀려남도 실제상황이다. 아멘!!
주님의 적폐청산은 묶인 것을 풀어서, 각 사람의 영혼을 풀어서 자유를 허락하시는 것이다. 그 시대 백성과 이방인을 구속했던 것이 무엇인가? 동물의 피만 빨아먹으면서 성전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유대교 성전이었다. 주님은 성전정결운동을 통해서 나귀를 묶던 끈을 풀 듯이, 율법의 끈을 풀어서 새로운 성전을 해방하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성전이며, ‘제자공동체’의 교회다.
힘없고 나약한 제자 공동체는 주님이 잡히실 때, 어린나귀처럼 도망쳤지만, 다시 주님께 돌아와서 주님을 태운 겸손한 나귀새끼가 되었다. 겸손한 나귀새끼는 곧 섬김의 권력으로 연합하는 교회공동체이다. 공동체의 주인은 그리스도요, 교회는 그의 몸이다.
무화과 나무 저주 사건은 성전정결운동을 중심부에 두고 있다. 열매가 없어서 무화과 나무는 심판을 받았다. 즉, 이스라엘의 열매는 곧 성전인데, 성전이 강도의 굴혈이 되었고, 돈버는 것에만 관심있었다. 이러면 안된다. 각 사람의 마음성전에 무엇이 있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벌고, 사회활동을 하고, 취직을 해야겠지만, 하나님과 함께 해야한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복음의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면, 창조주께서 그 인생을 날마다 창조하신다. 죄의 열매만 여는 무화과 나무는 뿌리까지 말라 죽고, 새로운 무화과 나무가 자라게 하실 것이다. 그 능력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죄의 무화과 나무가 죽지 않으면, 그 인생은 죄속에 갇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