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3시, 잠에서 쫓겨나 기도하고, 마가복음 11장을 읽다가 성경을 베개삼고 엎드렸다가, 아침을 맞았다. 새로운 신앙서적은 내게 자극을 줘도 결국 복음서로 복원한다. 복음서는 읽고 또 읽어도 스프링처럼 나를 출렁이게 한다. 이제, 저녁 9시다. 다시 잠으로 돌아갈 시간, 인생의 끝날도 이렇게 올 것이다.
“저물매” (마 20:8)
포도원 주인 비유에서 5차례 품군을 모집하고, 오후 6시가 됐다. 주님은 “저물매”라고 말씀하신다. 주일설교는 해당 본문으로 전해졌다. “저물매”라는 단어를 듣는데, 내 인생의 끝날이 수평선처럼 순간 보였다. 결국, 끝날이 올 것이다. 그때, 나는 어떠한가?
먼저 온 자들과 나중 온 자들이 있다. 먼저 온 자들은 특권의식을 갖고, 나중 온 자들은 희망을 갖는다. 축구경기를 봐도, 새롭게 투입된 선수는 활기가 넘친다. 시작부터 뛰면 지친다. 인생은 갈수록 나이가 드는데, 어떻게 하면 나중 온 자가 될까?
주님은 마태복음 4장에서 베드로를 보고 그 장모의 열병을 치료하셨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역시 주님은 베드로의 발을 씻기셨다. 변함없이 주님은 베드로를 사랑하셨다. 베드로의 비겁한 행동을 직접 목격한 주님은 부활후 다시 베드로를 찾아가 그를 사랑하셨다. 처음 만난 그 때처럼 주님은 행하셨다. 끝날이 곧 온다.
예수님은 할례를 받은 유대인이다. 복음사역을 펼치셨을 때,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펼치셨고, 십자가에서 대속물로 죽임을 당하셨다. AD30년이다. 이후 20년이 지나고, AD50년에 바리새파에서 기독교로 넘어온 신도들이 안디옥 교회에서 “할례가 없다면 구원도 없다”는 궤변을 주장한다. 바울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사도회의 의장인 야고보의 주장을 반대한 것이다. 마치, 루터가 로마교황의 면죄부 사건을 반대하듯…. 구원을 받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발견한다.
일몰 1시간 전에 온 품군처럼, 죽음을 목전에 둔 우측 강도처럼, 주님을 붙들리라.
인생 끝날, 내 운명이 어찌 될까, 오!!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