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19년을 많이 기다렸다. 1989년 이단종교를 ‘진리의 부름’으로 믿고, 성경의 새로운 해석에 기꺼이 헌신했다. 그리고, 10년이 지났을 때, 나는 영혼의 상실에 빠져, 방황하는 청년이 되었다. 쓸쓸한 해변가로 살던 내게 주님은 어떤 여인의 손길로 오셨다. 1999년, 나는 부활의 기회였다. 10년후, 내 꿈은 이혼으로 파선했다. 2009년, 절벽에서 떨어진 고통으로 성경을 읽고, 또 읽고, 신앙서적을 읽고, 또 읽고…. 내가 이혼도장을 찍던 그날, 내가 다니던 종교단체 총재도 감옥에서 첫 성찬식을 했다. 2009년 6월 8일. 나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나와 그는 무엇으로 연결되어, 무엇으로 끊어질까? 있어도 없는 듯, 없어도 있는 듯, 그렇게 독신생활로 10년을 보냈고, 작가로 새로운 직업을 갖게 됐다.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리고, 어느날 주님은 나를 종교탐방으로 불렀다. 부르심에 순종하여, 나는 마태와 마가와 누가와 요한이 기록한 복음의 원음을 읽고,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작가로서 이러한 축복은 어디서 맛볼 수 있을까? 2019년, 내가 그토록 기다렸던 그 해가 지금 지나간다. 그날이 되어보니, 내가 믿었던 ‘과거의 진리’가 거짓임을 비로소 알게 되는 해였다. 나를 인도하시는 주님께서, 성령께서 나를 어디로 이끄시던지, 아멘으로 따라가리라. AD50년, 이방인 교회가 5개로 늘어났다. 겨자씨처럼 불면 날아갈 비스디아 안디옥 교회, 이고니온 교회, 루스드라 교회, 더베 교회다. 이방인의 모교회는 안디옥 교회다. 5개 이방인 교회를 위하여, 예루살렘 본교회는 “할례없이 십자가 구원이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것은 은혜였고, 이방인들의 축복이었다. 훗날, 그 축복이 유대인 성도들에게도 주어졌다. AD64년 7월 네로황제 시절 로마시 1/4이 불탔다. 불심판은 기독교 대박해로 돌변해서 피바다가 되었다. AD66년 그 잔인했던 때, 이스라엘은 스스로 독립을 선포하고 독립화폐를 만들었다. 이스라엘의 승리같았다. 승리에 취한 그들은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었다. 시카리당과 젤롯당의 내분은 동족상잔의 비극이다. 그때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기독교인은 그곳을 떠났고, 바울이 세운 이방인 교회의 은혜를 받아야했다.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다. 우리가 베풀었던 그 은혜가, 우리에게 돌아올 수도 있다. 때론 요셉처럼 버려짐을 당한 그 세월이 형제들을 영접하는 은혜가 될 수도 있다. 사도 바울은 요셉처럼 이방인 교회를 섬기면서 감당할 수 없는 질고를 겪었으나, 훗날 본교회 성도들에게 안식처가 될 수 있었다. 그 누가 미래를 알랴!! 내 인생이 어찌 될지, 성령께 맡길 뿐이다. 지구행성을 떠나는 날, 구원의 손길이 내게 머물길 간절히 요청하며, 그렇게 살 뿐이다.
오!! 나의 2029년이여!! 그때는 또 어찌 될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