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교회 목사님은 1945년 닭띠였다. 어떤 교회 앞에 ‘닭동상’이 세워져, “자기 것”으로 알고서, 그 성전을 구입했다. 설교말씀에 그 내용이 전해졌고, 모든 성도가 “역시 닭이다, 신기하다, 뜻이다”고 믿었다. 교회와 닭이 어떻게 연결될까, 단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옛날 교회를 떠나고, 올해 4월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사건이 발생했을 때, ‘청동 닭동상’이 뉴스에 보도됐다. 그때도 나는 ‘어!! 닭이 천주교에도 있구나!!’라고 신기하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사역을 연출한 어떤 장소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나를 안내해준 분을 따라서 산을 올랐다. 그러다가, 그곳에서 ‘닭’을 만났다. 올해 8월 초 사건이다. 그때 그 충격은….. ‘아!! 닭과 베드로!!’ 그리고, 닭과 닭띠와 청동닭이 모두 하나로 일치하는데, 인간의 무지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닭은 슬픔의 통곡이요, 돌이킴의 좌표다.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막 14:72)
베드로가 계집종의 질문에 2번 부인했다. 그때 이미 닭이 1번 울었다.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3번째 부인하고, 닭이 곧 2번째 울었다면, 그 전에 이미 1번 울었다는 것이다. 닭이 1번 울었지만, 베드로는 3번째 질문에서 더 강하게 “저주하며 맹세하되”라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다. 꼭, 청문회 현장에서 “모른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그런 태도다. 그리고, 2번째 닭이 울자, “네가 3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예수님 말씀이 기억나면서, 베드로는 울었다. 인생, 결국, 그 약함을 예수님께 맡기고 울 뿐이다.
AD55~56년 출간된 마가복음에서 베드로는 어찌 이렇게 아름다운 고백으로 참회록을 적을 수 있었을까? 3번째 부인하는 장면에서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라는 표현은 베드로의 고백이 아니라면, 나올 수가 없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변화시켜, 슬픈 닭처럼 울게 하였을까?
갈라디아서 2장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베드로의 민족적 우월감을 놓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 사건 이후, 베드로는 사도회의에서 사도 바울과 바나바의 이방인 개척을 드러내놓고 증거하고, 이방인들을 위한 선교전략을 대폭 수정할 것을 건의한다. 할례없이 구원이 있다는 사도회의 안건이 통과되는데 베드로의 힘이 컸다.
[갈 2: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행15:11]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우리는 그들(이방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오!! 슬픈 닭이여!! 돌이킨 베드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