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은혜로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면, 성도는 모든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 자유에 한계가 없을까? 구원은 자유에 제한을 두지 않으면, 보편적 도덕률을 벗어나서 행동하는 것도 ‘허용’될까? 성경적으로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분명히 제자들에게 “자신들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르라”고 하셨다. 십자가의 은혜는 각자에게 새로운 십자가를 부여한다. 은혜와 함께 의미가 주어지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하면서 “음행사건”을 놓고, 매우 강도높게 비판하고 있다. 성도들에게 사랑과 자유를 말할 사도의 입에서 “사탄에게 그를 내어주라”고 말할 정도로 단호하다. 아담으로 사망이 인류에게 왔고, 예수님으로 생명이 왔다. 아간의 범죄로 모든 이스라엘 군대의 기강이 흐려졌다. 그 1명이 지도자에 위치하거나, 그 1명을 지도자들이 두둔한다면, 교회의 거룩함은 상실한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음행에 빠져서 교만한 자를 교회밖으로 내쫓아라”고 경고한다. 즉, 출교명령을 내린 것이다.
예수님은 성만찬식을 하면서, 결국 가룟유다를 배제시켰다. 세족식까지 마쳤지만, 이후에 가룟유다의 범죄사실을 12사도들에게 공표했다. 가룟유다를 마지막으로 회심시키기 위해서, 모든 사랑을 퍼붓고, 경고를 한 것이다. 그때, 가룟유다는 박차고 자리를 떴고, 결국 일을 저질렀다. 죄를 범한 것을 알았을 때는 용서와 포용이 정답은 아니다.
목회자와 성격이 맞지 않다면, 그것은 서로 조율하면서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범죄에 대한 ‘무감각’은 그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합당한 조치를 내려야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국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처럼, 언약궤까지 뺏기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십자가의 은혜를 받고도 사람은 약해서 죄에 빠질 수도 있다. 그렇다고 ‘죄’를 ‘의’로 혼동하면 안된다. 죄에 쉽게 빠지는 자신의 과오를 다시 참회하고, 하나님께 진실로 낮아져서 뉘우쳐야한다. 은밀히 아시는 하나님께서, 성령께서 인생의 연약함을 고치실 것이다. 고린도교회의 잘못된 음행이 바울의 귀에까지 들어갈 정도면, 심각했던 것이다.
[고전 4:17]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사도바울은 디모데를 보내면서 예수님께서 보낼 ‘진리의 성령’과 연결해서 설명하고 있다. 디모데는 곧 성령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성령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성직자가 있다는 것은 교회의 축복이다. 디모데가 바울의 행함과 가르친 것을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다시 생각나게 했을 것이다. 그처럼, 교회 성직자들은 성령을 받아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십자가의 사연을 성도들에게 생각나게 해야한다. 설교의 능력은 곧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게 함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