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안에서 믿음의 동업관계
길을 걸으면, 내 몸과 눈은 따로 걷는다. 발은 까페를 향하고, 눈은 갑자기 지나가는 여인을 쳐다본다. 본능이다. 무엇이 보이는가. 뱃세다 맹인을 치료하신 주님이 맹인에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었다. 맹인은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이 보인다”고 대답했다. 주님은 다시 눈을 감기고, 안수하셨다. 우리가 보는 것과 주님이 보길 원하는 것, 그곳에 ‘맹점과 망막’(網膜)이 있다.
누가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를 타고, 설교를 마치시고, 베드로의 그물로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았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잡혔다. 동업자 요한에게 자랑할 정도였다. 베드로와 안드레와 요한과 야고보가 함께 겪은 사연이다. 무엇이 보이는가? 잡힌 물고기가 보이면, 요한은 배가 많이 아팠을 것이다. 베드로의 배로 잡았으니 동업자로 갖는 분깃이 작았을 것이다. 무슨 일인지, 그들이 무엇을 보았는지, 그물 자체를 버리고, 직업을 전환했다. ‘어부’에서 ‘제자’로.
오병이어와 칠병이어 기적을 직접 체험한 제자들에게 주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었다. 베드로는 마태복음 16:16에서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다. 예수님이 “대속적 그리스도”를 말하자,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를 설명하자, 베드로는 반대한다. 베드로는 주님을 보았는데, 주님의 무엇을 보았을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주님이 원하는 것을 보는가?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을 보는가?
마태복음 20장에서 베드로의 동업자 요한과 야고보는 새치기를 한다. 3년의 제자사역의 결과는 ‘나눔’에서 ‘쟁취’로 서서히 변질됐다. 10명의 제자들을 뒤로하고, 요한과 야고보가 어머니를 내세워 권력청탁을 한 사건은 ‘동업관계의 신뢰’를 깨뜨린 것이다.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잡은 물고기를 요한과 나눴는데, 왜 요한은 베드로와 나눌 수 없었을까? 요한이 본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교회안에서 믿음의 동업관계는 무엇일까? 교회안에서, 교회밖에서 우리는 진정 무엇을 보는가?
그러다가, 주님이 정말로 죽으셨다. 제자들은 혼비백산(魂飛魄散)이 되었다. 권력도, 명예도, 조직도, 서열도 모두 주님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인데, 주님께서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요한복음 20장에서 “내가 주를 보았다”고 막달라 마리아가 말한다. 오!! 모두 주님을 처음 만났던 그 시점으로 초기화된다. 벳새다 맹인이 ‘나무같은 것들의 걸어감’을 보자, 주님은 다시 그 눈을 감기셨다. 주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영혼을, 신앙을, 천국을, 십자가를, 못 본다면, 주님은 그 눈을 다시 감기시리라!! 주님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의 시체 실종’ 사실을 베드로와 요한에게 알려주자, 젊은 요한은 빨리 달렸다. 베드로는 마음도 몸도 지쳐서 늦게 도착했다. 토끼와 거북이처럼 요한은 토끼다. 그런데, 토끼처럼 경주에서 이긴 요한이 무덤밖에서 베드로를 기다린다. 주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이 이것이 아닐까? 막달라 마리아에게도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말하라”고 보냈다. 교회안에서 믿음의 동업관계는 과연 무엇일까?
사도행전 3장에서 이제 베드로와 요한은 완전한 ‘동업자’로 연합했다. 성전 미문에 들어가는데 앉은뱅이가 있었다. 그때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그 앉은뱅이를 보면서 “우리를 보라”고 말한다. 베드로는 “나를 보라”고 하지 않고, “우리를 보라”고 한다. 그 우리에는 요한과 주님이 들어있으리라!! 인생, 돈과 권력과 명예가 보이면 동역자가 경쟁자로 보이고, 주님이 보이면 동역자가 협력자로 보인다. 진정, 무엇이 보이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