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의 성령잉태설은 노골적이다. “요셉이 남편이 아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반면, 누가복음의 성령잉태설은 상당히 완곡하게 표현했고, 남편이 하나님인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특히, 약혼한 상태에서 마리아가 임신할 것을 예언으로 받고, 그 말씀이 이뤄짐을 믿는 장면은 거룩하다. 모든 잉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 남자를 알든, 모르든,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면, 그 말씀이 이뤄진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눅1:1)
확실히 누가는 통찰력이 ‘숲’과 같다. ‘사실’에 대해 기록하는 목격자들의 ‘저술’을 목격하는 누가를 보라!! 붓을 든 자들은 ‘사실’을 봤고, 누가는 붓을 든 자들의 ‘저술’을 통해서 ‘사실’을 보고 있다. 모든 저술을 확인하고, 근원부터 자세히 관찰한 누가는 비로소 붓을 들었다. 그리고, 누가는 세례요한의 출생과 예수님의 출생을 적고 있다. 도대체 누가는 무엇을 본 것일까? 사가랴 사건에서 누가는 무엇을 봤을까? 바로, 이삭의 출생을 본 같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늙어서 아이를 가졌는데, 세례요한의 출생과정이 상당히 흡사하다. 즉, 아브라함이 낳은 ‘이삭’과 사가랴가 낳은 ‘세례요한’이 있다. 둘은 모두 ‘예수의 탄생’을 예고하고, ‘예수의 죽음’까지 상징한다. 이삭의 번제사건은 ‘예수의 십자가’를 예언했고, 세례요한의 순교사건도 ‘예수의 십자가 피세례’를 예언했다. 이삭을 약속하면서 등장하는 ‘할례’는 세례요한이 등장하면서 ‘물세례’로 치환되면서 예수님의 출현을 예고한다. 결국, 마리아를 통해 태어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증거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되었다. ‘말씀’으로 된 것이다. 여기에 그 무슨 과학적 검증을 한다면서 초음파 장비과 유전자 검사를 해야한다는 것인가? 생물학적 아버지가 누군지 그것을 따지려는 자들은 하나님의 신비를 어리석은 것으로 바꿔서 ‘예수의 탄생’을 부인하는 것이다. 태초에 빛이 있음으로 빅뱅은 믿으면서, 어찌 하나님의 아들이 ‘빅뱅’으로 이 땅에 태어날 수 있음을 믿지 못하는가!! 창조의 신비는 창조주의 능력이니, 그가 행하시면 전능자의 능력이다. 모든 인간은 인간의 방법으로 태어나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 땅에 태어날 것인즉, 유일하신 하나님이 인간이 된 그 사건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도 ‘성령의 은혜’다. 기독교의 믿음은 세상이 보기에 ‘미련한’ ‘성령잉태설’에서 시작한다. 인간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면서 하나님은 이 땅에 오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