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容恕) forgiveness
‘용서가 증오의 깃발을 끌어내렸다’라는 제목의 기사는 조선일보 2015년 7월 11일 A2에 실렸다. 최근 미국 인종차별 살해사건이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인종차별 상징인 남부연합기 퇴출법에 대한 기사제목이다. 53년만에 인종차별의 상징인 남부연합기는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딜런 루프는 23일전 성경공부를 하던 흑인교회에 침입해서 9명을 살해했다. 이 사건은 미국을 발칵 뒤집어놨다. 우리나라였다면 아마도 빨갱이 숙청이 진행됐을 판이다. 곳곳에서 진보의 깃발 혹은 보수의 깃발이 나부꼈을 것이다. 범인을 색출하라고 광화문에서 지금까지 진을 치고서 시위를 하고 그 앞에 ‘정치인들’이 드글드글 했을 것이다. ‘정의의 깃발’로서….
그러나 미국은 달랐다. 대통령부터 달랐다. 흑인에 해당하는 오바마 대통령은 장례식장에 직접 참여해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불렀다. 화해와 화합을 강조하면서, 인종차별은 미국을 망치는 ‘독(毒)’으로 분류했다.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은 법정에서 ‘범인’을 향해 용서의 눈물을 흘렸다. 가장 분노해야할 유가족들이 ‘용서’를 구하면서 ‘자비’를 베풀자, 미국은 울고 말았다. 또 다른 제2의 딜런 루프가 나타날 것 같았으나, 용서와 자비를 베푸는 유가족들과 미국시민들의 놀라운 화합은 그 자체가 기적이 되어서 사건이 발생한 교회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사랑이 낳은 놀라운 기적은 결국 인종차별의 상징인 ‘남부연합기’를 내리게 만들었다.
<조선일보 워싱턴 윤정호 특파원>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남부연합기가 사라지기까지는 용서의 힘이 컸다. 흑인교회 피해자들은 볼티모어나 퍼거슨처럼 흑인의 죽음에 항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족들은 범인을 감싸안았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장례식에서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부르며 화해와 화합을 강조했다. (중략)
제니 앤더슨혼(42) 의원은 “남부의 유산을 보존하자는 말은 더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 증오와 차별의 상징이 된 깃발을 놔둘 수는 없다”고 눈물로 호소했다. 그의 주장은 반향이 컸다. 남북전쟁 당시 노예제 존치를 주장하며 북부근(연방군)에 맞선 남부연합 대통령인 제퍼슨 데이비스가 혼 의원의 조상이었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건이던가?
우리 대한민국은 언제부턴가 이러한 사랑과 평화를 잃어버렸다. 곳곳에 나부끼는 정의의 깃발에서는 사랑의 그늘이 없다. 평화의 비둘기는 정의의 날선 검위에 앉지 못하였다. 왜 우리 대한민국에는 이러한 큰 사랑의 물결이 숨쉬지 못하는가? 이러한 감동은 화려한 말의 무늬로는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다. 오직 사랑의 물결은 ‘용서와 자비’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용서(容恕)는 얼굴 용(容)과 용서할 서(恕)로 구성된다. 얼굴은 그 사람의 마음 자체이다. 얼굴로서 용서를 한다는 것은 마음으로 용서한다는 것이고, 이는 역지사지(易地思之)에 해당한다.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면 용서하지 않을 수 없고, 진심으로 상대를 위해서 기도해주게 된다. 이것이 가장 아름다운 선행이다. 서(恕)는 같을 여(如)와 마음 심(心)의 합성이다.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곧 ‘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