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1장은 신약성경의 첫 번째 기록문서다. 구약은 창세기가 맨 처음 작성됐을 것이다. 신약성경은 갈라디아서가 맨 처음 기록되었고, 사도들의 순교 때문에 남아있는 사도들(마태, 베드로, 요한….)이 기록의 경각심을 깨닫고, 마가복음(베드로)과 마태복음(마태)을 남겼다. 작성된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을 토대로 바울의 권면을 받은 누가는 ‘연대기 순서’로 설교원문과 간증문과 인터뷰 기사를 첨가했다.
마가복음은 초고(草稿)이고, 마가복음이 각각 유대인들을 위해 마태복음으로, 이방인들을 위해 누가복음으로 완성됐다. 요한복음은 기독교가 확산되면서, “예수 가현설”과 “성령파 계시” 등등 새로운 영적 도전을 직면한 사도 요한이 마지막으로 붓을 들어, 요한복음을 기록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께서 육체로 오셨고, 그 육체가 살아났다”는 것을 집중보도한다.
그 당시, 하나님과 예수님을 나누는 영적 도전을 직면했음을 알 수 있다. 요즘 시대에, 성자예수를 ‘성자와 예수’로 각각 구분하는 이단의 성경해석도 새롭게 출현했다. 그 이단은 성자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성자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는 않는다. 요한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다”고 도마의 언어로 확정했다.
갈라디아서 1장에 “다른 복음”이 나온다. 직격탄을 날린 바울의 심경은 무엇일까? 바울은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다. 다른 복음은 ‘변질된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곧, 십자가 복음에서 벗어난 새로운 복음이다. ‘바리새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을 뜻한다. ‘율법적 십자가 복음’이다.
▲다른 복음 ▲변질된 그리스도의 복음 ▲율법적 십자가 복음은 모두 같은 뜻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 의미를 잘 알지 못한다. 편지를 받은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이 ‘이단’에 속했다고 하자. 갈라디아서 1장을 읽으면, 다른 복음은 ‘십자가 복음’이 된다. 또한, 기독교인들은 ‘이단’이 곧 ‘다른 복음’이다. 자신들의 인식으로 성경을 악용하는 것이다. 바울이 지목한 ‘다른 복음’의 전파자는 구체적으로 있었다.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바울은 편지했다. 그들에게 전파된 ‘다른 복음’이 바로 거짓 복음이다. 바리새파에서 전도된 지도자들중에서 십자가 복음을 왜곡시켜서, “모세의 율법을 중심한 예수님의 세례”를 강조한 자들이 있었다. 어떤 이단들은 거짓으로 전도되어 교회를 파괴하기도 하는데, 그런 식의 바리새파 전도법이 바울 시대에도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의 평화속에 거짓복음이 간첩처럼 숨겨진 것이다.
나는, 우리는, 십자가 복음으로 살고 있는가?
다른 복음은 ‘십자가 복음’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마치, 창세기 3장처럼 더욱 지혜롭게 보이는 논증으로 들어온다. 교란이다. 교(攪)는 손 수(手)와 깨달을 각(覺)이 합쳐졌다. 覺은 學과 見의 합성이다. 배움으로 보는 것이 ‘깨달음’이다. 覺은 절구통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절구통속에 벼를 넣고, 절구로 찧는 것이 곧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절구통을 계속 찧듯, 거짓의 껍질을 벗기는 것이다. 攪는 절구통과 손이 합쳐졌으니, 절구질을 뜻한다. 그래서 ‘섞다, 흔들다, 혼란스럽게 하다’는 뜻이 생겼다.
십자가 복음은 구약의 볍씨를 십자가로 찧어서 ‘구원과 속죄’의 은혜를 선물로 주신 것이다. 이미 쌀알이 되어서, 우리는 그 복음을 받아드리면 된다. 그런데, 쌀알에 돌을 섞어서, 다시 절구질을 한다면, 그것은 ‘다른복음’이다. 십자가 복음은 이미 ‘쌀알’이다. 그래서 십자가를 없앤 새로운 복음은 바울의 직언처럼, ‘다른 복음’이며, ‘거짓복음’이다. 날마다 죄의 미세먼지를 뒤집어 쓰고 살아가는데, 도덕적 마스크는 미세먼지를 막을 수가 없는데, 방독면도 죄를 정화할 수 없는데, 십자가 외에 구원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