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10월 2일, 요한복음 2장을 읽었다. 2장에는 ▲혼인잔치 ▲포도주 ▲신랑 ▲성전정결운동 등이 나온다. 얼핏 보기엔, 예수님이 남의 결혼식에 초대받아서 ‘포도주’를 만드신 것으로 보이지만, 사도 요한의 집필목적은 ‘비유와 암시’다. 2장 1절 시작부분에 ‘사흘째’가 20절 ‘3일동안’과 연결된다. 예수의 어머니는 마리아인데, “유대교”를 상징한다. 요한은 실제 사건을 은밀히 ‘비유’로 암시한 것이다.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았듯, 유대교도 예수님을 낳았다.
요한은 혼인잔치와 성전정결운동을 일치시킴으로 ‘물의 포도주 변환 표적’이 ‘성전정결운동의 십자가 사건’과 일치됨을 말하고 있다. (두 사건의 편집을 통한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이 가능한 것은 두 사건이 상당히 닮아있다. 사흘째=3일동안, 정결예식의 돌항아리=죄사함의 성전. 다른 점은 가나의 혼인잔치는 ‘물로 된 포도주’를 만들어줬고, 성전정결운동에서는 노끈 채찍으로 소와 양을 내쫓고 장사하는 사람들을 책망했다.
요한은 포도주 사건을 첫 번째 표적이라고 표시하고, 이어서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는 유대인의 질문을 실었다. 성전된 육체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 곧 ‘물로 된 포도주 표적’과 연결됨을 말하고 있다. 왜냐면, 포도주 표적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과 성전된 육체가 살아난 사건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이 같다. 표적(表迹)은 안내판과 같다. 물이 포도주가 된 그 표적은 가나의 혼인잔치 손님들을 기쁘게 하기 위함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표시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알려주는 사건이다.
장독같은 돌항아리 여섯에 물세례를 하듯, 항아리를 정결케 하니, 떠서 가져다주므로 포도주가 되었다. 물세례에서 피세례로 완성된 예수님의 3년 사역을 함축한 사건이다. 사도 요한은 최후의 목격자로서 지난 세월을 더듬어 보면서, ‘돌항아리 물세례 사건’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재발견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정결예식을 위한 돌항아리는 형식주의에 불과하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는 하나님을 만난다. 돌항아리는 요한복음의 곳곳에서 자주 등장한다. 사마리아 여인과 만남에서도 “물”이 나온다.
형식적 종교행위를 없앨 수는 없지만, 그러한 형식이 구원을 주지는 않는다. 돌항아리의 형식속에 ‘물로 된 포도주’가 담길 때, 우리는 영생의 포도주를 마실 수 있다. 그런데, 연회장(宴會長_피로연 사회자)은 결혼식 신랑에게 고맙다고 말한다. 요한은 이것을 놓고,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라고 회상했다.
예수님이 참 신랑인데, 땅의 신랑에게 감사하고 절하면서 우리는 살아간다. 권력의 신랑, 돈의 신랑, 갑질하는 신랑에게 굽신거리며, 살아간다. 참 신랑을 불러, ‘물로 된 포도주’의 은혜에 감사해야한다. 아주 작은 사건이라도, 불가능한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면, 그곳에는 하인(下人)된 천사들이 협력해서 주님의 십자가 은혜가 함께 한 것이다.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주님을 보는 믿음의 눈을 떠야한다.
포도주가 떨어지자, 어머니 마리아는 당장에 예수님께 “포도주!!”라고 말한다. 우리와 똑같다. 힘들면, 그것을 놓고 “주여!!”라고 울부짖는다. 현실고는 주님을 붙들게 하는데, 주님의 응답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퉁명스럽다. 그때,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요청한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 것이다.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듯, 주님이 무엇을 말씀하는지 그 세미한 음성을 들었다. 주님은 여섯 돌항아리를 보면서 2문장을 말씀하셨다.
1.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2.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채우라”하니, 하인들이 아귀까지 채웠고, “떠서 갖다 주라”하니, 하인들이 갖다 주었다. 주님의 말씀대로 하자. 주님의 말씀을 마음의 돌항아리에 채우고, 그 말씀을 행위로 드러내자. 주님께서 포도주의 은혜를 베푸시리라. 돌항아리가 어떻게 생겼던지, 아무 상관없다. 심령의 마음을 정결케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