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현저한 차이점은 ▲성령잉태 ▲3대시험 ▲겟세마네 갈등이다. 공관복음에는 있는데, 요한복음은 없다. 왜 다를까? 시대상황이 반영된 것이다. 초대교회가 급성장했고, 이방교회의 엘리트 그룹이 들어오면서, 합리적 의심의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요한복음 1:1에 등장하는 ‘로고스’는 ‘법’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말로는 ‘도(道)’로서 로마제국이 추구하는 가장 완벽한 ‘진리’를 일컫는다. 요한복음은 ‘그 로고스’가 ‘예수님’이 되었다고 증거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는다.
“그 이름”이 매우 중요하다. “이름”은 “찾고 부르는 것”이다. 야곱이 이삭을 속여 축복을 가로챌 때, “에서입니다”라고 속였다. 아내들과 자식들을 모두 얍복강을 건너게 하고, 홀로 얍복강 나루터에 남겨진 야곱은 밤샘 ‘번뇌의 씨름’을 했다. 그때 씨름하는 천사인지, 귀신인지, 어떤 존재가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때 야곱은 비로소 “야곱입니다”라고 했다. 이름은 곧 그 실체다.
초대교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이 전한 복음’보다 더 탁월한 성경해석이 나타났다. ‘예수님이 빠진 성경해석’은 구원이 없다. 요한복음은 그것을 말하고 있다. 공관복음은 3대 시험이 ▲자격론처럼 보여진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갈등은 ▲실패의 십자가로 보여진다. 그 틈을 누리고 합리적인 의심을 던지면서, “나를 따르라”고 외친 거짓 선지자와 계시자가 난무했을 것이다. 지금 시대처럼!!
사도 요한은 일침을 가한 것이다. 광야에서 70일 금식기도를 할지라도 메시야가 될 수 없다!! 십자가보다 더한 극형의 고문을 당할지라도 ‘어린양’이 될 수 없다!! 예수님은 태초의 그 말씀이며, 곧 하나님이므로!!! 공관복음은 “예수님이 성령잉태를 통해, 3대 시험을 통해, 십자가 번제를 통해” 구원주가 된 것으로 증거하는데, 사도 요한은 “본래 예수님은 구원주이다”라고 확정한다. 그것이 말씀이신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다. 그 권세가 예수님께 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도를 모집하고 부흥하는 교회들이 많다. 그때, 성도들이 모였을 때, 예수님의 자리에 ‘교주’가 앉을 경우, 창세기 3장의 사건이 발생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이 주어진다. 이것을 명심해야한다. 예수님은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따랐다. 그처럼, 교회는 끝까지 예수님의 이름을 붙잡아야한다.
이단들은 잘되니까, 기독교 교리를 변경해서, 자신을 구원주로 선포한다. 성경말씀은 ‘성경해석’으로 변질시켜, 자신을 구원주로 내세운다. 거짓에 휩쌓인 뱀의 혀다. 하와도 아담도 뱀의 독에 물리니,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다. ①예수님 ②십자가를 거부하는 곳은 구원이 없다. 요한복음에서는 의심많은 도마가 예수님의 상처를 만져보고, “나의 주님이요, 나의 하나님입니다”라고 고백했다. 살아나신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한 것이다. ‘예수님의 육체’와 ‘예수님의 이름’을 분리할 수 없듯이, 하나님과 예수님은 분리될 수 없다!! 오직 예수님이며, 오직 십자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