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화끈한 사랑, 불같은 사랑을 원한다. 활활 타올라야, 뭔가 될 것 같다. 불이 타오르면, 재(灰)만 남는다. 동백꽃 필무렵은 ‘색다른 불’보다 일상의 소중함을 말하고 있다. 아주 평범한데, 그것이 갈등의 촉매제다. 일상의 소제가 저렇게도 급진적으로 발전할 수 있구나!!
동백은 용식의 사랑을 확인하고, 그동안 감췄던 ‘치부책’(장부에 적은 일기장)을 가지고 경찰서에 출두했다. 그곳에는 집주인이 술을 마시면서, 자신의 손등을 만졌거나, 추태(醜態)를 부린 구체적인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다. 동백은 노규태를 고소하기로 결정했다. 이 사실은 ‘다른 드라마’에서는 소제가 될 수가 없는데, ‘동백꽃 필무렵’과 ‘옹산 지역사회’에서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언제부터 우리는 “촛불 100만명” “사망 100명”이라는 숫자에 반응하고, 우리의 일상은 양말 벗듯 던져 버렸던가!! 양말은 빨아야하고, 일상은 입어야한다. 동백꽃 필무렵은 미혼모의 이야기가 아니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우리는 모두 ‘미혼모’다. 혁명이 과연 새로운 이상세계를 가져오겠는가? 천만에!!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여기면서 그렇게 인생은 살다가 죽는 것이다.
# 만두한판
경찰서 순경 용식이는 불처럼 여자를 사랑한다. 미혼모 동백씨를 만나자마자 마음이 꽂혔다. 이제, 동백이 자신을 변호하고, 궁지에 몰린 용식을 구해준 동백을 위해서, ‘일편단심’을 확정한다. 그때, 용식은 천진난만하다. “만두 한판 먹으러 가죠?”라고 한다. 얼마나 순백한가. 그렇게 만두를 먹으면서, 불같은 사랑을 고백하려고 했더니, 동백은 찬물을 끼얹는다. “불같은 사랑은 한때 해봤어요. 불같은 사랑은 다른 분과 하세요!!”
그리고, 동백은 만두를 보면서, “만두는 불없이도 익어요. 김이 모락모락….. 우리는 만두처럼 천천히 따끈해요”라고 하니, 용식은 ‘심장’이 다시 쿵쾅쿵쾅한다. 불처럼 사랑하지 말고, 만두처럼 사랑하자는 그 표현에 용식은 ‘비유’를 깨달은 것이다. 동백은 새롭게 사랑을 시작했다. 사랑의 빛이 비추니, 과거의 동백은 죽고, 새로운 동백으로 부활했다. 드라마속 까멜리아 여사장 동백도 그러한데, 하물며 주님을 믿는 인생이랴!! 주님을 믿으면, 과거의 자신은 죽고,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2천년 전,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다. 누가는 십자가 다음날을 한문장으로 압축해 표현했다.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 (눅23:56)
유대인 지도부도 쉬었고, 제자들도 쉬었고, 주님도 쉬셨다. 얼마나 평범한 일상의 삶인가!! 부활의 주님께서 촛불집회를 한 것이 아니다. 유대인 규탄대회도 하지 않았다. 어떤 성명서도 없었다. 십자가에서 죽기전에 하셨던 그 평범한 일상이 그대로 되풀이됐다. 놀라운 일이다. 성만찬식때 마가의 다락방에 모이듯, 그렇게 또 제자들은 모였다. 갈릴리 호수에 내려가서도 주님은 제자들과 ‘조반’을 드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