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함과 피를 토하는 심경으로 썼던 복음서의 증언을 믿는다면, 거룩한 십자가를 함부로 폐(廢)할 수 없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때 “십자가 무용론”을 배웠고, 그 성경해석을 받아드렸다. 성경적 핵심 근거는 4가지였다.
1. 십자가 전에 예수님은 “말”로 구원을 시켰다.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했다.
2.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이 잔이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3. 사도 바울은 “관원 1명이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가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4. 십자가 사건이 없고, 예수님이 오랫동안 살았다면, 지상천국이 되었을 것이다. 육신이 죽어서, 반쪽 구원밖에 이루지 못했다.
“말”로 구원이 가능하다면, “법”으로 구원이 가능하다면, 예수님이 홀로 계시면서, “이 땅의 모든 죄를 용서하노라”고 하시면, 그 시대가 깨끗해졌을 것이다.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방법으로 되지 않아서 그렇다. 이단 교주들은 “말 몇마디”로 죄사함을 베푼다. 교주의 이름을 믿으면, 모든 죄가 용서된다고 가르친다. 그런 죄사함은 ‘거짓 죄사함’이고, ‘거짓 구원’이다. ‘거짓 구원’은 ‘참 구원’이 올 때까지 ‘참’의 자리를 차지한다. 하나님의 자리에 앉은 불법자다.
이단의 십자가 무용론에서 빠진 것이 있다. “부활”이다. 예수님은 육체로 부활했다. 육체가 죽었으나, 무덤속에서 다시 살아났다. 피흘림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고, 창조주의 능력으로 그 육체가 살림을 받았다. 그래서 주님을 믿는 육체마다 살아있을 때 살림을 받는 것이다. 부활은 육체로 있는 그 때 실현된다.
떨기나무에 하나님의 불이 붙으니, 그 떨기나무가 타지 않고 영생했다. 그와 같이, 100년 남짓 살아가는 풀같은 인생에 부활의 주님이 임재하면, 영생을 얻는다. 주님이 아니면, 영생은 없다. 이단의 교주는 모두 육체로 죽기 때문이다. 육체로 죽임을 당하고, 육체로 부활해서 영체가 되신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 예수님은 살과 뼈를 가진 완벽한 영체로 존재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교주들은 유령처럼 흐믈흐믈하다.
예수님은 요단강 물세례에서 시작해, 골고다 피세례로 구원사역을 완성하셨다. 요단강에서 물세례를 받고, 물에서 나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왔고,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는 말씀이 있었다.
물세례는 4가지 깊은 뜻을 내포한다. ①태초에 수면을 운행하신 하나님 ②홍수심판 ③구약의 할례 사건 ④어린양의 씻김이다. 백성의 죄는 요단강물에 유구한 세월동안 담겨 있었다. 나아만 장군의 죄도 그 속에 있었을 것이다.
죄의 오물을 대신 뒤집어 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재창조되셨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또한 우리를 위해 기꺼이 물세례를 받으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물세례를 받으면, 예수님의 그 행하심의 능력으로 “내가 기뻐하는 아들이다”는 말씀이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물세례는 하나님의 족보에 입적되는 입양조건이다. 죄사함은 심판주가 피조물의 몸을 입고, 죄의 물세례를 받고, 죄값을 청산한 피세례를 받음으로 계산된 것이다. 믿는 자마다 죄의 노비문서는 불탄다.
이단의 모든 교주들은 누가 구원을 시키는가? 그들은 스스로 구원을 시키는가? 그 증거는 무엇인가? 성경은 “피” 없이 “구원”은 없다고 말씀했다. 피는 곧 생명이다. 교주들은 살아있는데, 어찌 스스로 구원하리요? 누구의 피값으로 죄사함이 일어났는가? 그래서, 이단의 구원주는 구원주가 아닌 것이다. 구원주는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 구원주의 자리에 앉는 자마다 ‘죄’의 그물에 잡힌다. 이것이 천법이다. 나는 하나님께 물었다. “내가 섬긴 그는 누가 구원을 시킵니까? 구원주를 구원하는 자는 누구입니까?”라고. 예수님이다. 예수님의 대속(代贖)이 없다면, 죄의 강을 건널 수가 없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운명하신 그 나무 십자가”를 말하지만, 주님께는 탄생부터 부활까지 모든 생애가 “십자가”였다. 창조주께서 창조주의 유전자를 마리아의 자궁(子宮)속에 잉태했을 때, 그곳이 궁궐(宮闕)이겠는가? 무한대의 창조주가 미립자로 축소되어, 고정됐다. 그것이 십자가다. 창조주는 잉태의 순간, 십자가로 확정됐다.
겟세마네 동산은 아담의 에덴동산을 상징한다. 아담은 선악의 갈등에서 ‘악편’을 선택해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을 떠났다. 주님은 선악의 갈등에서 ‘선편’인 하나님의 뜻을 택해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갔다.
그 길이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모리아산 번제의 길이다.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듯, 2천년후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을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서 인류를 위한 대속의 어린양 제사를 드렸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기꺼이 번제로 바쳤고, 숫양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 숫양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강물처럼 흘르는 아담의 죄가 하나님의 아들이 피흘림으로 비로소 씻김을 받은 것이다. 12년 혈루증으로 고생한 여인의 피흘림이 멈추듯, 주님의 피흘림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된 것이다. 십자가가 없다면, 죄사함도 없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외에는 ‘죄를 사하는 구원주’는 존재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