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하나님의 권세는 어떻게 세워질까? “웃시야 왕이 죽었을 때”(이사야 6:1)의 문장은 도입부에서 강력한 선언을 내포한다. 어쩌면, 이 문장 때문에 1~6장을 썼을 수도 있다. 6:1이 본래 1:1인데, 이사야가 그렇게 출간하지 않은 이유는 또한 무엇일까? 웃시야 왕이 죽고, 참된 왕이신 하나님이 교회에 나타나셨고 이사야가 그것을 봤다.
그 시대에 하나님을 영접한 이스라엘 백성은 오직 1사람, 이사야다. 하나님은 하늘보좌에 앉으셨고, 그 웃자락이 성전에 그득했다. 성전은 하나님의 옷이다. 성전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품속에 안기는 것이다. “내가 너 안에, 너가 내 안에”라는 말씀은 “우리가 주님의 교회에, 주님이 우리 집”에를 의미할 수도 있다. 집의 가장이 ‘자신’인가? 주님인가?
국가의 주인이 대통령인가? 국민인가? 하나님인가? 이사야 1명밖에 없었지만, 하나님은 홀로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표가 1표밖에 없었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보낼 단 1사람이 없어서, 발을 동동 구르자, 이사야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자원한다. 아담도 그러했어야 했다. 에덴동산에 처박혀서, 향락을 누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내쫓김을 받기 전에, “나를 저 세상으로 보내소서”라고 했어야 했다. 죄를 짓고 에덴을 떠나는 것이 나은가? 자원해서 에덴동산을 세상으로 확장하는 것이 나은가?
웃시야는 성군이다. 대한민국의 세종대왕과 같다. 웃시야가 제2의 다윗으로 이스라엘을 회복하길, 이사야는 내심 바랬을 것이다. 웃시야 왕은 다윗왕권의 부활을 이루지 못했다. 웃시야가 죽으니, 민족은 침통함에 빠졌다.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셨다. 우리가 믿는 절대적인 ‘1사람’이 죽으면,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신다. 절대적으로 믿는 그 1사람이 사실상 우상일 확률이 매우 높다. 사람은 믿을 존재가 아니다.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그 사람을 버리고, 떠날 때, 하나님의 실존이 드러난다. 하나님은 우상시하는 그 사람 위에 계시는 절대자다. 웃이야 왕이 죽은 해에, 하나님은 나타나셨다.
하나님을 뵙고, 이사야는 즉시 자신의 입술이 범한 죄를 돌아본다. 진정 하나님을 만난 자는 이와 같다. 청와대에만 초청받아도, 각종 옷 매무새를 단장하고, 행동거지를 조심한다. 요즘은 청와대 만찬에서 대통령을 면전에 두고도 ‘비판’을 일삼지만, 동방예의지국에서 언어의 품격이 필요하다. 이사야가 입술의 죄를 심각하게 자백하자, 천사가 부섯가락으로 숯불을 가지고 입에 대니, 악이 사라졌다. 성령의 불이 임하면, 악이 사라진다. 무화과 잎새로 옷을 입고, 하나님이 나타나자 두려워한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은 가죽옷을 선물했다. 하나님은 항상 악을 멸하고 생명을 보호한다.
이사야의 특명은 “깨닫지 못하는 백성이 깨닫지 못하도록 외치는 것”이다. 모세의 10대 재앙처럼, 바로의 마음이 계속 둔해지고, 어두워지고, 강팍해졌다. 하나님의 심판이 강해질수록 악의 세력도 강해진다. 1/10이 남을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은 계속 진행되고, 거룩한 씨가 그루터기처럼 남을 때까지 그렇게 하신다. 그루터기는 곧 ‘뿌리’다. 그곳에서 다시 가지가 돋을 것이다.
인생이 송두리째 날아갔어도, 하나님은 거룩한 그루터기는 남기신다. 그 씨앗이 바로 이사야이며, 생존자이며, 예수님이다. 천국의 씨앗을 받은 자들은 세상과 구별되어 거룩하게 보존한다. 내년에 뿌려질 씨앗은 밥으로 먹지 않는다. 세상 것으로 인생이 쓰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거룩하게 보존된 자들은 세상의 영광이 없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해서, 거룩한 씨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