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얼마전에 전화했다. 친척 결혼식이 있다고 알려왔다. 삼촌의 큰 아들이 결혼했다. 그 결혼식에 다녀왔다. 그날 나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안산에 있는 그 결혼식에 참석했다. 그 방문이 삼촌의 마음을 흥분시켰고, 내 어머니는 함박꽃이다. 바빴지만, 정말 잘했던 일이다. 어머니가 기뻐하니, 내 마음도 기뻤다.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천국을 비유한 예수님의 말씀이 나온다. 천국은 ‘혼인잔치’가 아니고, 혼인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으로 비유된다. 그 혼인잔치는 ‘아들의 결혼식’이다. 온갖 음식을 장만하고, 동네 사람들을 초청했다. 초대장을 보냈는데, 사람을 직접 보내서 모셔오게 했다. 이런 환대가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그들은 오지 않았다. 왕과 무슨 악감정이 있었던 것일까? 돈이 안된다고 생각했을까? 왕의 아들 혼인잔치에 부름을 받은 것이 곧 ‘왕의 부름’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이 불렀을 때, 모세는 응답했다. 그 장소가 초라한 ‘가시떨기’였다.
내가 삼촌의 아들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다면, 당분간 삼촌과 연락을 못할 것이다. 어머니는 마음이 조금 상할 것이고, 새로운 결혼식이 있기까지 나는 서먹서먹한 관계를 유지해야한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혼인잔치랴!! 예수님은 신앙공동체인 교회를 신부로 삼고, 인류를 위해 ‘혼인잔치’를 베푸셨다. 초대에 응하는 자들은 모두 하객이며, 신부며, 친구다.
마태복음 22장에서 천국의 권력과 복지 수준을 알 수 있다. 천국의 복지혜택은 ‘결혼식 잔치’ 수준이다. 음식이 풍족하며, 최고의 먹거리다. 천국은 ‘왕의 혼인잔치’가 아니다. 왕의 아들 혼인잔치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연합이 곧 천국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의 혼인잔치를 위해서 기꺼이 모든 음식을 베푸시고, 동네 주민들까지 은혜를 받고, 그 혜택이 값없이 주어진다. 하나님과 아들의 연합이 인류의 연합으로 확장된다. 여기에 동네 주민들이 참예한 공로는 없다. 값없이 주어진 은혜다. 임금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초청자 명단도 정한다.
초청자 명단이 바뀔 수 있음을 또한 알아야한다. 첫 번째 초청자 그룹과 두 번째 초청자 그룹이 있다. 그것을 결정한 존재는 왕이다. 왕이 모든 것을 결정했다. 왕의 아들이 결정한 것이 아니다. 왕이 모든 것을 아시고, 첫 번째 초청자 그룹이 왕의 주권을 무시하니, 그들을 진멸했다. 그리고 새로운 초청자 그룹을 정하고, 그들을 초청했다. 예복을 입지 않은 어떤 하객이 쫓겨났다. 예복을 입고 가야하는데, 그것은 무엇인가?
나는 삼촌의 아들 결혼식에 참여하면서, 가장 깔끔한 양복을 입고, 맛있는 뷔페를 맛있게 먹었다. 즐거운 식사였고, 신부의 아름다움이 신랑의 준수함과 어울렸다. 그들의 축복을 간절히 소원했다. 삼촌은 내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존재를 있는 그대로 좋아했다.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우리의 마음은 어떤 예복을 가져야하는가? 그 혼인잔치를 축복하는 것이다. 주님의 혼인잔치는 ‘십자가의 피흘림’으로 언약이 성취됐다. 그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것은 십자가의 피흘림을 믿고, 거룩한 성찬식을 거룩하게 새기는 것이다. 십자가로 성취된 혼인잔치를 믿지 않는 자마다 예복을 입지 못해서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이 된다.
대한민국은 삼권분립으로 이뤄져 있고, 법치국가다. 법이 모든 것을 다스린다. 반면, 천국은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신다. 마태복음 22장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고, 하나님께서 군대를 보냈다. 하나님께서 경제권과 군사권과 행정권을 모두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 혼인잔치에 직접 들어가서 손님들을 만났다. 하나님의 직접통치가 이뤄지는 곳이 곧 천국이다. 계시록에서도 주님의 오른손에 일곱사자를 상징하는 일곱별이 놓여있고, 일곱교회를 상징하는 일곱촛대 사이로 주님이 발자국 소리를 내면서 걷고 계셨다. 주님은 교회 본당을 오늘도 성령의 발자국 소리를 내면서 걸어가신다. 성도가 살고 있는 집의 거실을 방문하고, 성령으로 마음을 노크한다. 성령의 귀있는 자는 그 소리를 듣고, 응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