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론인으로서 다양한 설교를 듣고, 성경을 묵상하면서, 나름대로 깨달은 것을 스스로 편집해서 작성한 글입니다. **
– 장창훈 작가
[6편] 주님은 물으신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낫기 위해서 38년 된 병자는 ‘정죄받을’ 각오를 해야만 한다. 맞바람을 맞으면서 걸어갈 결정을 해야한다. 눈이 빛나는 햇살에 반응할 각오를 해야한다. 동굴에 나오는 자는 새로운 세계를 적응하기 위해 ‘불편한 현실’을 감당해야한다. 그것이 ‘자리를 들고’다. 물건이동의 자유가 안식일에는 허락되지 않았다. 빨간 신호등에 길을 건널 수 없다. 그런데, 주님은 무단횡단을 해서 건너라고 한 것이다. 왜냐면, 신호등이 고장났으니, 주님의 말씀을 신호등으로 믿고 따르라고 한 것이다. “자리”는 곧 율법의 혜택이다. 자신이 누리는 그 유익을 포기하지 않고서 어찌 새로운 것을 얻으리요?
나는 이혼남이다. 그래서 결혼에서 자유롭다. 결혼은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묶인다. 내가 부부생활을 할 때, 내가 자유롭게 어떤 일을 결정하자, 아내는 “의논없이 했다”고 불평했다. 내가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 상당히 부족했다. 내가 혼자 살 때는 버는 것이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살았으나, 부부로 있을 때는 경제적 수입이 적은 것이 ‘죄’가 되었다. 내가 새로운 배우자를 만나서 재혼을 한다면, 혼자서 누리는 자유를 포기해야한다. 둘을 함께 누릴 수는 없는 것이다. 바알도 섬기고, 하나님도 섬기는 신앙은 ‘우상숭배’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예수님의 말씀이다. 진리를 알면, 자유가 온다. 그렇다면, 진리가 오기전까지 인생은 진리를 알지 못한다. 진리를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 왜냐면, 진리는 빛과 같아서, 인생의 눈은 ‘빛’이 아니다. 그 빛에 반응하는 존재일 뿐이다. 어떤 인생이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는가? 인생이 진리를 외치지만, 진리의 지식을 외칠 뿐이다. 진리의 본체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진리는 곧 성령이다. 진리의 성령이 존재하므로, 인생은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그 누구도, 어떤 지식도 진리를 알려주는 도구일 뿐, 진리 자체는 될 수 없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스스로 “무지”를 인정할 때 가능하다. 진리를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빛을 거부하여, 소경이다. 진리의 빛을 받아드리는 것은 진리를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진리는 지식과 전혀 다르다. 하나님앞에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그것이 진리를 통해 자유를 얻는 방법이다. 진리가 떠나는 인생은 지식의 노예로 전락한다. 지식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리의 성령이 와야한다. 전교조를 비롯해서 종교 지도자들이 지식권력에 종속된 노예로 살아가는 이유는 진리의 성령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자유의 주인은 ‘진리’다. 곧, 성령이요, 예수님이요, 하나님이다. 스스로 자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님이 와야한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했을 때, 그 질문을 던진 예수님을 통해서 자유가 온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핵심이다. 사도 바울이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 말씀이 실제로 효력이 있는 것은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말씀을 전했기 때문이다. 이 시대도 동일하다. 누구의 말씀으로 믿고 따르는가?
마태복음 25장과 요한복음 5장을 상호 연결해서 본다면, 1달란트 가진 자는 “자리”를 깔고 계속 누워있는 것이다. 그대로 누워있으면, 먹을 것을 가져다주고, 언젠가 요행을 기대하면서 막연한 희망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것이 율법이다. 율법은 은혜의 그림자여서, 실제적 혜택이 드믈다. 예수님은 실제로 오셔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자, 두 달란트를 받은 자, 한 달란트를 받은 자에게 실제로 ‘자유의 달란트’를 주셨다. 그 자유를 누리라고 했다. 무엇을 하더라도, 스스로 책임지고, 자리를 들고 걸어가서 새롭게 인생을 살라고 하신다. 광야로 나가라고 하신다. 홍해를 건너라고 하신다. “자리를 들고”가 곧 “홍해의 갈라짐”이다. 율법의 홍해가 그 순간 갈라졌고, 38년된 병자는 율법이 갈라진 틈새로 걸어서 빛이 있는 주님께 온 것이다. 이것이 은혜다.
1달란트를 받은 자는 그것을 땅에 묻고 주님의 뜻대로 했다고 생각했다. 아니다. 주님의 뜻을 오해한 것이다. 이 비유의 큰 그림은 헤롯대왕과 연결된다. 헤롯대왕이 실제로 안토니우스의 편에 있다가,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와 대결해서 패배했다. 대통령 선거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이긴 것과 같다. 이긴 순간, 헤롯대왕은 탈당하듯, 옥타비아누스에게 붙었다. 조선시대에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시기에 외교관계를 어떻게 해야할지 갈등할 때와 비슷하다. 그래서 헤롯대왕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정치적 로비를 하려고 해외순방을 갔는데, 국내 정치를 측근에게 맡긴 것이다. 그렇다면, 측근들은 무엇을 해야하는가? 받은 돈으로 장사해서 유익을 남기는 것이 아니다. 받은 돈으로 “헤롯대왕의 가게”를 열었던 것이다. 유익을 남기는 것은 ‘덤’이다. 유익을 남기지 않더라도, 간판을 내걸고 장사하는 것이 최우선의 목표였다. 헤롯대왕의 이미지를 통한 비유해석이다.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 챕터 31장 참조, p619)
그래서, 주님은 그 시대 성도들에게 “나를 시인하면, 나도 아버지앞에서 너를 시인할 것이다”고 했다. 그리스도를 공개적으로 시인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침묵은 부정하는 것이다. 1달란트를 받은 자는 헤롯대왕과 그 반대편에 모두 줄을 선 사람이다. 그래서 바알도 섬기고, 하나님도 섬기다가 그것이 들통난 것이다. 과연, 누구를 섬기는가?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며, 그것을 공표한다. 십자가를 통해서만 구원이 있고, 십자가를 벗어난 자들은 ‘생명의 길’이 무너졌으니, 6.25 사변이 일어났을 때 한강다리를 폭파하듯, 십자가의 다리가 무너진 종교마다 생명에 이르지 못한다.
십자가는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좁은문이다. 십자가는 피흘림의 역청이 칠해진 노아의 방주와 같다. 시대마다 십자가의 교회가 있고, 십자가를 거부하는 세속종교가 있다. 생명은 오직 십자가의 피흘림이 있는 곳에만 있다. 그곳이 시대의 지성소이다. 각 사람도 마찬가지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자는 모든 시민들이 알도록 크게 가게를 차리고 반대자들의 공격을 감당했다. 그래서 주인이 돌아와서 그것을 칭찬한 것이다. 공개적으로 간판을 차리면, 왕을 따르는 백성은 그 간판의 물건을 사게 된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으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경제를 책임진다. “자리를 들고”는 곧 “간판을 내걸고 공개적으로”가 된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땅에 묻고서 장사를 전혀 하지 않았고, 간판을 내걸지 않았다. 침묵은 녹슨 동전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