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아디라 교회는 매우 작은 교회인데, 일곱 편지중에 장문의 편지를 받았다. 다른 곳에서 살짝 언급된 ‘니골라당의 교훈’이 여기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또한 니골라당 교훈을 따르는 자들에게 대한 심판까지 나온다. 두아디라 교회에 침입한 니골라당은 여자 이세벨인데, 이 교훈을 따르지 않을 경우, ‘새벽별’이 허락된다. 새벽별(morning star)는 예수님의 새 이름이다. 내가 떠났던 종교단체는 새벽별로 불리웠는데, 어느날부터 새벽별의 호칭이 사라졌다. MS라고 불렀던 것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예수님이 떠나니, 그 이름도 떠난 것이다. 새벽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새벽별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을까? 새벽별로 시작했다가 유리하는 별이 되버린 그들의 잘못은 무엇인가?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랐기 때문이다. 성공적 목회를 해야하나? 진실한 목회를 해야하나? 두가지 갈림길에서 계시록은 ‘진실한 목회’를 촉구한다. 성공적 목회를 하기 위해,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이 교회를 유혹했다. 두아디라 교회를 비롯해서 일곱 교회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우상제물’ 문제였다. 이것은 단순히 ‘우상제물’의 식사문제가 아니었다. 세상과 타협하면서 복음의 원본을 수정해야하나? 복음의 원본을 지키더라도 세상 것을 버릴 것이냐, 그 문제였다. 마태복음 4장과 같고, 창세기 3장과 같다.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인데, 네가 용납했다. 여기서 ‘너’는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다. 두아디라 교회 감독이 자칭 선지자를 용납했으니, 여자 이세벨은 교회에서 ‘선지자’로서 활약했다. 그 영향력이 대단했을 것이다. 세상과 타협하니, 성공적 목회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주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경고장을 날린다. 복음의 원음이 훼손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다.
이단교회는 “십자가”를 “심정의 십자가”로 살짝 변경한다. 또한, “종말의 재림”을 “현실적 재림”으로 변경한다. 초림이 있으니, 재림도 있고, 이후에 종말이 있다고 가르친다. 보이는 교주가 새로운 메시야로서 활동하니, 교회가 부흥한다. 그러나, 그것은 비진리요, 우상이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다는 것은 생명의 떡인 예수님을 거부하고, 거짓된 뱀의 독을 마시는 것이다. 이세벨의 유혹이다. 여자 이세벨이 계시록 후반부에 ‘음녀 바벨론’으로 확장된다.
여자 이세벨이 교회 내부로 침입한 세상 로마요, 옛뱀의 후예다. 세상적 가치를 가진 자들은 죄인이니, 십자가앞에 자복해서 구원을 받아야한다. 십자가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긍휼이다. 세상이 십자가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여자 이세벨은 환란을 받는 교회를 걱정하면서, 세상이 교회를 구원한다는 논리를 편다. 거짓말에 속으면 안된다. 모든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
십자가로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다. 이단교회가 아무리 잘되어도, 그것은 거친 물거품에 불과하고, 소멸하는 장작불이다. 성령의 불이 임하면 성경의 진리가 드러난다. 성도들은 갈수록 성경을 멀리하는데, 어찌 성령이 임했다고 하겠는가? 교주는 풍요롭고, 성도들은 궁핍하니, 그 또한 공산주의적 종교세계다. 세상은 어둠이요,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새벽별이다. 누가 새벽별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으로 살아가는 참된 기독교인이 새벽별의 주인공이다. 세상에 매몰당하지 않는 숭고한 새벽별로 살아갈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