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救援)과 영생과 믿음과 성령은 모두 같다. 구원은 죄에서 건져냄이고, 영생은 사망에서 벗어남이고, 믿음은 하나님께 붙음이고, 성령은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 것이다. 주님께서 “나는 참포도나무요”라고 말씀했고, 또한, “나는 생명의 떡이요”라고 말씀했고, 또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했고, 또한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했고, 또한 “나는 선한 목자다”라고 말씀했다. 모두 같은 말이다. 그처럼, 구원과 영생과 믿음과 성령은 모두 같다. (성경에 나오는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영생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요한복음은 생명이 영생이다.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생명나무 열매는 영생이다. 창3:22에 근거한다.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창조한 ‘구원의 기호’다. 예수님께서 만드셨고, 또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만드셨다. “십자가”는 본래 존재하는 사물이지만, 그것을 새롭게 정의하신 분이 예수님이다. 십자가는 곧 ‘구원의 하나님’을 뜻한다. 왜냐면, 모든 생명의 마침표는 하나님의 종말을 암시한다. 십자가는 곧 ‘죽음’이니, 마지막이요, 오메가요, 완성이다. 끝이 구원으로 완결되면, 이 보다 좋을 수 없다. 주님의 십자가는 ‘축복’이다. 구원과 부활과 영생과 성령이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본질을 정확히 알아야한다. 주님이 새롭게 한 십자가는 무엇인가?
가령, 요한복음에서 일곱가지 표적이 나온다. 물이 포도주가 된 사건과 오병이어 표적이 등장한다. 그때, 물이 포도주로 변한 표적이 상당히 중요하다. 수소와 산소가 결합하면, 새로운 물질로 ‘물’이 만들어진다. 그와 같이 물이 주님의 말씀과 결합하면 포도주가 된다. 물이 포도주가 될 때, 주님의 말씀이 있었다. 주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것이다. 곧, 주님은 성육신한 하나님이다. 물이 포도주로 바뀌듯, 저주의 십자가는 구원의 십자가로 바뀐다. 무엇을 보는가?
가령, 1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던 주님께서 병이 든 나사로를 찾아오지 않았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간곡히 부탁했지만, 이틀동안 지체하고, 장례식장을 향했다.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렸던 주님이다. 예수님이 죽기를 기다린 하나님이다. 왜냐면, 죽어야 살린다. 그 죽음으로 나사로와 마리아와 마르다의 믿음을 더욱 새롭게 살릴 수 있으니, 주님은 그 때를 기다렸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죽기 전에 살려주소서”라고 부탁하지만, 주님은 나사로가 죽기까지 기다렸다.
무엇을 보는가!! 내가 죽으면, 주님이 나를 살린다. 죽은 나사로와 살아난 나사로는 모두 같다. 사람들은 “나사로가 죽었다”고 말하고, 주님은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말했다. 주님이 ‘잠들었다’고 표현한 것은 ‘살려냄’을 전제한 것이다. 주님은 나사로를 다시 살릴 것을 결정했고, 그래서 이틀을 지체한 후에 그곳을 간 것이다. 누구도 나사로를 죽은 데서 살릴 줄 믿지 않았다. 나사로가 걸어서 나올 때까지 그러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무덤에서 나올 때까지 누구도 그 육신이 죽은데서 살아날 줄 믿지 않았다. 무엇을 보는가? 죽은 주님, 살아난 주님. 주님의 육체가 살아나서 새로운 육체로 부활했다고 믿는 자마다 살아서 새로운 육체로 덧입는다.
‘십자가’를 이해함에 있어서 다양한 관점이 있다. 관점(觀點)는 보는 지점인데,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로 십자가의 비밀이 새롭게 풀려진다. 비유의 관점을 정확히 알면, 십자가의 능력이 자신에게 임할 것이다. 십자가와 구원은 불가분의 관계다. 구원론을 쓰면서, 십자가의 비유를 길게 서술한 목적이 여기에 있다. 십자가를 버리면, 주님의 능력도 없다. 바울은 평생 ‘십자가’를 외쳤다. 십자가의 무엇을 외쳤을까? 우리는 그것을 분명히 알아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