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거나, 낮거나, 주연이거나, 조연이거나, 배경이거나, 인생은 그렇게 흘러간다. 1등을 하는 사람도 모든 것에 ‘1등’일 수는 없다. 누군가를 ‘1등’으로 만들기 위해 ‘2등’으로, ‘3등’으로, ‘꼴찌’로 낮아질 수도 있다. 주님은 그것을 ‘인자의 권력’으로 불렀다. 구름타고 오시는 주님은 신적 권능을 가지셨으니, 권력을 초월하신다. 높은 주님은 낮은 곳에 기꺼이 처하시고, 죄인의 옷도 입고서 십자가에서 죽고, 무덤에 묻혔다가, 실제로 살아나셨다. 사망을 이기신 주님, 과연 그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더러운 귀신 들린 딸, 그런 딸을 둔 어머니, 세상적으로 연약한 제자들, 그런 제자들을 둔 예수님. 수로보니게 여자와 예수님은 그 입장과 처지가 상당히 비슷하다. 귀신들린 딸과 제자들도 흡사하다. 하나님은 마귀에게 붙잡힌 아담의 자녀들을 지금까지 돌보시며, 구원하길 애타게 기다리신다. 수로보니게 여자와 예수님과 하나님은 모두 같은 처지다. 주님은 수로보니게 여자처럼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께 엎드렸고, 십자가를 받아드렸다. 딸을 살리려고 엎드린 어머니처럼 그러했다. 마귀에게 붙잡힌 인류를 살리려고 하나님은 ‘독생자’를 골고다로 던졌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세상적 탐욕이 가득한 성도들을 둔 목회자를 생각해본다. 누군가는 새벽마다 십자가 밑에서 눈물로 메달려 기도하므로, 어린 딸같은 성도들은 마음에 평강이 밀려온다. 흉악한 귀신들린 자는 자신이 그러한 줄 전혀 모른다. 중독(中毒)이 그만큼 무섭다. 중독에 빠진 자녀를 둔 부모도 병자다. 자녀가 귀신에 들렸는데, 부모가 아무렇지 않다면, 그것은 남남으로 살아서 그렇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더럽다”는 것은 “깨끗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인생은 땅에 속해서, 날마다 더러워질 수 밖에 없다. 죄의 바이러스는 날마다 마음을 침략한다. 그래서, 십자가앞에 엎드려야한다. 수로보니게 여자처럼,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처럼. 누군가의 귀신들림이 보이거든, 또한 수로보니게 여자처럼 대신 눈물로 참회해야한다. 그것이 성령님의 인격이다. 이 글을 마치고, 청소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