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길은 없다. 인생 하나의 길이다.
‘두마리 토끼를 잡다’, ‘일석이조’ ‘꿩먹고 알먹고’ 등등 ‘속도’를 강조하는 격언이 사람들에게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하곤 한다. 나에게도 그러하다. 하나의 일을 해서, 그것이 두가지 효과를 발휘한다면 일거양득(一擧兩得)이 아니고 무엇인가? 세븐일레븐 편의점에 가면, 언제나 ‘1+1’ 음료수가 인기를 끈다. 이 또한 일거양득이 아니던가? 하나의 값을 가지고 2개를 얻는 것은 늘상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인생을 돌아보면 언제나 과거의 흔적은 오직 하나의 길이다. 내가 가려다가 말았던 길이라도, 내가 걸어왔던 그 길은 뱅뱅 맴도는 길이든, 힘겹게 하나의 길을 걸어왔든, 참혹한 어둠의 터널이든, 배회하는 젊은 날 후회의 삶이든, 참회의 날들이든 그 모든 것은 단지 나의 길로 기록된다. 내가 걸었던 ‘하나의 길’이다.
“너가 홀로 있을 때, 부끄럽지 않은 그런 삶을 살렴”
내 안에서 내가 나에게 늘 멘토링하는 말이다. 홀로 있을 때 부끄럽지 않은 길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양심(良心)과 관련있겠다. 좋은 마음(양심)이란 뜻을 가진 양심은 도대체 무엇일까? 거울은 나를 비추듯이 내 마음속에 좋은 마음의 거울이 있어서 나로 하여금 ‘선하고 나쁘지 않은 방향’을 알려주는 것 같다. 그렇다. 부끄럽지 않은 길은 곧 방향과 상관있겠다.
나는 1999년에 인생역전의 기회를 만나서, 완전히 새롭게 살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배회했고, 나를 중심으로 하고싶은 일들(포카, 술, 담배, 나의 감각이 원하는 다양한 삶의 즐거움과 오락들, 당구…..)을 좋아했고, 친구들도 많았었다. 결혼을 하려던 그 나이에 나는 ‘내 인생의 목적’에 대해 깊은 상념을 하게 됐고, 신앙을 통해서 내 삶의 변혁을 맞이했다. 쉽진 않았으나, ‘革’(변혁)이 짐승 가죽을 벗긴다는 의미가 있듯이, 나는 내 삶속에서 인본의 가죽을 벗기는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지독하게 아프고 고달픈 날들이었다.
어느덧 내 나이 44. 사랑에 실패했던 내 과거의 아픈 기억이 아물어가는 지난 날들이다. 인생이 만약 100년이 아닌 1천년의 삶을 산다면, 또한 어떠했을까싶지만, 인생은 대략 100년의 삶을 살기 때문에 이제 나는 책의 중반부를 넘어섰다. 내가 살았던 날들이 이제 나의 50%를 대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는 후회없다. 내가 걸었던 길은 ‘양심’과 ‘진실’의 길이길 원했고, 앞으로 내가 가야할 길의 방향도 그러함을 나는 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믿는 나의 하나님이 참으로 좋다.
“너가 너에게 진실하다면, 모두가 너에게 진실 것이다. 약속을 지키렴”
나는 커피 자판기를 참으로 좋아한다. 그 이유는 약속 때문이다. 간혹 말 안듣고 양심불량의 커피 자판기가 있지만, 대부분 커피 자판기는 약속을 지킨다. 내가 돈을 넣는만큼 약속을 배신하지 않는 그 믿음이 커피를 제공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공공의 약속이던가?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커피 자판기는 그 즉시 발길질을 당하고 만다. 하물며 사람이랴!!! 그런데 왜 사람들은 ‘약속의 지킴’을 대수럽지 않게 생각할까? 나는 그것이 참 싫다. 약속은 지키기 위해서 맺는 것이다.
170권의 책을 집필하고, 내가 종이위에서 걸어왔던 책의 흔적은 나의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한 가장 아름다운 글의 능력이어서, 젊은 날 내가 벗겨낸 그 짐승의 껍질들과 ‘각피의 고통’에 대한 값진 부활임을 나는 스스로 고백한다. 내가 홀로 나를 벗겨내지 않았다면 과연 나는 지금 어떠한 삶을 살고 있을까? 여전히 벗겨지지 않은 인본의 가죽들을 가만히 만져보면서, 더 새롭게 하기 위해서 나는 기꺼이 인내의 터널을 지나기로 결심해본다. 두 길은 없다. 오직 하나의 길이다. 내가 가야할 길은 ‘양심’과 ‘진실’의 방향임을 더욱 인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