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목회활동은 12명의 제자들을 지도자로 세우는 삶이었다. 마가복음 8장에서 베드로가 그리스도로서 고백한 이후에, 제자들은 지속적으로 ‘자리다툼’을 했고, 그때마다 주님은 어린아이를 통해 ‘인자의 권력’을 말씀하시면서, 인내롭게 그들의 변화를 원하신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 대해서는 그들이 먼저 변화되도록 헤르몬산에 데려가서 ‘산기도’까지 제자훈련을 하셨다. 그러나,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야고보와 요한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상황에 ‘영의정과 좌의정’에 대한 욕심을 내고 인사청탁까지 했다. 헤르몬산의 변모사건을 겪은 직후다.
13장에서 성전멸망을 말씀하시고, 14장에서 향유옥합을 붓는 사건이 나온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베다니 마리아의 오빠인 나사로를 주님께서 살리셨다. 향유옥합 사건이 일어나기 4개월 전 즈음이다. 14장과 15장과 16장은 주님의 죽음과 장례식과 부활에 대한 것이다. 특히 14장은 향유옥합 사건 이후에 가룟유다가 배신할 것을 결심하고, 주님은 제자 공동체에서 가룟유다를 지목하지만, 어떤 강력한 규제를 하지 못하고 사건이 그대로 이뤄진다. 주님께서 가룟유다를 끝까지 믿으신 것일까? 은신처였던 겟세마네 동산이 발각될 위험이 전혀 없었다고 생각했을까? 마가의 다락방에서 겟세마네로 이동한 것까지 이미 동선을 파악했던 가룟유다였다.
충성맹세를 하는 제자들을 향해 주님은 “너희들이 나를 버리고, 부인하리라”고 예언하신다. 베드로에게는 특히 “닭이 두 번 울기전에 세 번 부인하리라”고 하셨다. 주님은 제자들을 믿지 않았다. 사랑했을 뿐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마가복음 8장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한 베드로가 “십자가”를 공개적으로 반대했듯이, 충성맹세를 한 베드로는 보기좋게 계집종 앞에서 주님을 저주하며 부인했다. 대제사장 집안에서 있었던 일이다. 평생, 잊혀지지 않는 치욕이었으나, 그것이 베드로를 ‘새로운 반석’으로 거듭나게 하는 기회가 되었다.
주님은 “내게 와서 배우라”고 하셨다. 주님의 방법은 쉽다. 주님은 강압적으로, 억지로, 채찍을 때리듯 행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채찍을 맞으시면서, 십자가를 짊어지시면서 그렇게 행하신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으나, 그 또한 때가 되어서 스스로 행하도록 하시지, 억지로 억압하지 않으셨다. 주님의 방법은 철저하게 자유다.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났으나, 그때도 그들을 굴레로 씌우듯이 하지 않았다. 독재적으로 그들을 가두지 않고, 스스로 믿고서 스스로 행할 수 있게 하셨다. 이것이 성령의 방법인 것 같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죄의 대속물’이 되시는 십자가 사건의 사역을 온전히 감당하셨다. 마가복음 7장에서 “모든 음식물은 깨끗하다”고 하시면서, 사실상 제사제도를 폐지하셨고, 성전멸망을 통해서도 그 시대 율법의 제도를 폐지하신 것이다. 그리고, 어린양의 대속을 통해서 ‘모든 사람’을 거룩한 제물로 삼는 ‘새로운 시대’를 가져오셨다. 이것을 믿은 자는 없었다. 믿든, 믿지 않든, 주님은 십자가에서 뜻을 이루셨고, 부활하셨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믿지 않는 것은 각자 자유이지만, 믿는 자에게 ‘구원과 성령’의 축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