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장창훈 기자]=“포스트 코로나”를 놓고, 시대는 시대의 얼굴을 찾아가고 있다. 우리는 ‘얼굴없는’ 현재를 살아간다. 갑작스럽게 익숙하지 않는 문명의 진입로에 들어섰다. 어떤 길일까? 부산행 열차는 부산을 향해 가겠는데, 코로나 사태의 고속도로는 인류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인류에게, 우리에게, 각 개인에게 “길”을 묻는다.
가장 큰 타격은 “학교”와 “교회”다. 본래, 초대교회는 집단화되지 않아서, 전염병과 전쟁에 상당히 강했다. AD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멸망하기 직전,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 본토를 떠났다. 그것 때문에 정통 유대인들은 기독교를 맹비난했으나,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그렇게 했다. 교회는 사람들의 공동체로서 어떤 건물에 예속되지 않고, 어떤 지도자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집단화를 거부한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건물과 특정 지도자를 중심해서 거대화, 집단화를 이뤄냈다.
학교가 만들어진 근본목적은 산업사회에 접어들면서 많은 사람을 빠른 시간에 양육하기 위해서 시간과 비용을 절감하기 위히서였다. 표준화, 대량생산이라는 목표를 위해서 만든 사회시스템이 곧 학교다. 학교는 같은 교육을 같은 공간과 시간에 배우기 때문에 강한 집단의식이 생성된다. “동창”과 “동문회”가 바로 그러한 집단의식의 흔적이다. 그런데, 학교가 붕괴되고 있다. 성경에서도 마태복음 24장에 예루살렘 성전이 붕괴되고 인자의 영광이 나타난다고 했는데, 집단화된 권력은 사람의 개성을 말살시킨다.
온라인 강의는 듣는 청자에게 자발적 참여를 유도한다. 교사입장에서는 교사의 관리가 없다면, 학생들은 흩어질 것이라고 진단하지만, 학생 입장에서는 서툴러도 스스로 행함으로 교육의 맛을 깨닫는다. 무엇이든지 학생 스스로 하는 것이 빠를 수도 있다. 과거에는 모든 일을 현실에서 배웠다. 농사짓는 법을 교육하는 서당이 없었다. 논과 밭에 나가서 실제로 씨앗을 뿌리면서, 거름을 주면서, 낫을 들고 추수를 하면서 농사짓는 법을 배웠고, 집을 건축하면서 건축을 배웠다. 지금은 이론을 배운 후에, 현장에 투입된다. 만약, 집단화된 학교시스템이 해체되고, 학생중심의 새로운 온라인 강의 시스템이 정착된다면, 자유롭고 개성있는 학생들의 자율성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학교는 무엇인가? 각 사람의 인격을 함양하고, 한 사람의 소중함을 알게 함으로, 개성있는 교육이 실현되도록 하는 것이다. 전체중에 등수와 서열을 매기는 것은 전체주의요, 각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 ‘개성주의’다. 학교는 한 사람의 인격이 자신의 내면을 통해 드러나도록 교육해야한다. 그렇게 하려면, 소규모 교육이 중요하다. 오병이어 기적을 보이신 주님은 5천명을 50명씩, 100명씩 소그룹으로 나누어 앉게 하신 후에 오병이어 표적을 보이셨고, 이후에 그 무리와 제자들을 구별해서 분리한 다음에, 군중을 흩으셨다. 주님은 군중을 모으지 않고, 흩으셨음을 기억해야한다. 비대면 코로나 시대에는 ‘소규모 교육 공동체’가 필요하다.
전염병에 강한 미래학교는 “방역 시스템이 완비된 학교”가 아니다. 전염병을 근원적을 차단할 수 있는 교육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학교가 전염병에 강한 학교일 것이다. 이것은 소그룹 시스템이다. 학생들이 집단적으로 자주 만나는 지금의 학교시스템은 결국 변경될 필요가 있다. 동아리 활동을 비롯해서, 마을공동체를 어떻게 이뤄낼 것인가? 학교와 가족과 마을은 학생들의 미래를 놓고, 진지하게 고민해야할 때가 되었다. 학생은 일상생활속에서 교육 프로그램을 어떻게 배울 것인가? 떡복이를 먹으면서, 학교수업을 진행할 수는 없을까? 시골 고향에 내려가서 그곳에서 만난 새로운 친구들과 농구를 하면서 체육시간 수업을 이수할 수 있는 “온라인 네트워크 학점제도”는 언제쯤 도입될까? 전염병이 강한 학교 만들기는 이제 코로나 사태를 학교현장에서 실제로 겪고 있는 학생들의 미래숙제일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