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8장에는 [ ]가 있다. 대괄호가 있다는 것은 고대 사본에서 생략된 사건임을 암시한다. 간음하다 붙잡힌 이야기는 어떤 사본에는 있고, 어떤 곳에는 없다. 있는 것과 없는 것!! 어쩌면, 이 사건을 읽는 독자층이 딸을 둔 부모였다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 이야기는 빼고서 필사본을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필사본을 만들 때는 경제적 부담이 들었다. 이 사건은 보혜사 성령의 능력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보혜사는 곧 ‘변호사’를 말한다.
군중이 돌을 들고, 율법을 근거해서, 법률의 힘을 빌어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죽이려고 몰려왔다. 예수님은 민중재판의 판사로 임명됐고, 나아가 그 여자의 변호사로 나섰다. 군중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판사의 자격을 준 것이고, 주님은 그 여자를 구원하려고 변호사가 된 것이다.
그리고,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했다. 죄없는 자는 없다. 그리고 모두 집으로 돌아갔고, 죄있는 여자만 예수님앞에 남겨졌다. 이것이 인생이다. 모든 인생은 주님께 홀로 남겨진다. 죄인으로 남겨지고, 주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나를,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신다. 우리를 정죄하는 마귀는 이미 물러갔다. 죄를 타고, 계명을 통해서 죄가 들어왔으나, 주님께서 그 마귀를 물리쳐 이기셨으니, 정죄할 자가 없고, 주님도 정죄하지 않으니, 죄인된 인생은 주님앞에서 죄가 용서받은 것이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의 모습으로?
돌을 들고 율법을 행하려는 군중의 얼굴로?
군중들에게 율법의 근거를 제시하는 바리새인으로?
간음하다 현장에서 도망친 남자의 얼굴로?
구원의 은혜는 현장에서 붙잡혀 주님께 나아온 그 여자에게만 주어졌다. 이것이 요한복음이 말하는 영성이다. 죄인과 의인이 옷을 바꿔입는 독특한 사건이다. 주님앞에 의인인가? 죄인인가? 스스로 주님앞에 돌아보는 사건의 거울이다.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아멘!!)
결국, 주님 앞에 홀로 남겨진 인생일 뿐이다. 사람의 말들은 허공의 메아리일 뿐이다. 구원의 은혜, 심판의 권능을 가지신 분은 주님이신데, 주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고 하셨다.
그리고,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변호사로서 주님은 대적자인 마귀를 모두 물리치시고, 피해자를 보호하신다.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주님을 변호사로 선임하는 자마다 그러한 혜택을 받는다. 요한복음 14장 15장 16장에 나오는 성령의 존재는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변호한 주님의 사건을 통해 이해를 하면, 그 윤곽이 드러날 수도 있다. 마음속에 성령이 임하는 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혼의 변호사로 선임한 자이다. ‘나의 변호사’, ‘나의 구원주’는 누구인가? 마음으로 가장 신뢰하고 의지하는 변호사가 누구인가? 보혜사 성령을 받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주로 시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