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부갓네살 황제의 꿈을 해몽한 다니엘은 포상금을 두둑하게 받았다. 세친구도 덩달아 지방관리가 되었다. 축제는 잠시뿐, 환란이 즉시 찾아왔다. 금은동철 신상이 갑자기 ‘금신상’으로 돌변한다. ‘돌맹이’를 이길 수 있는 느부갓네살의 전략이다. 금신상은 ‘꿈의 무효화’를 위한 부적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다시 자기 생각으로 돌아간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선악과 금지’를 선포했지만, 뱀의 유혹하자 아내는 따먹었다.
다니엘의 꿈해몽에 대해, 바벨론 술사들이 재해석을 하면서, 금은동철이 금신상으로 바뀐 것이다. 국민의 여론, 날카로운 충언을 듣고 바뀌는 사람이 있고, 충고를 짓밟는 사람도 있다. 느부갓네살은 금은동철이 무너진다는 하나님의 묵시를 짓밟고, 금신상을 세웠다. 인간의 꼼수는 이와같다. 금신상을 세운다고 해서 금은동철 꿈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꿈”은 돌맹이처럼 황제의 뇌속을 때렸다. 그때부터, 바벨론 제국은 멸망되기 시작했다.
세 친구를 생각하자. 그들은 말단직원이다. ‘지방관리’라고 했지만, 구청장의 직급으로 봐야한다. 금신상을 세워놓고, 느부갓네살은 “바벨론 제국의 꿈”을 선포하면서, 기자회견을 했을 것이다. 참석자 명단에 세친구도 포함됐다. 그런데, 맨 꼴찌다. 직급이 가장 낮았다. 황제-총독-수령-행정관-모사-재무관-재판관-법률사-각 지방 모든 관원이다. 9번째, 즉 9급 공무원에 해당된다. 모든 관원속에 ‘세친구’도 들어있다. 대제국의 지도자들이 모였고, 맨 구석의 어디 쯤에 세친구도 참여했다. 나는 국회에서 열린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초대장이 없으면 들어갈 수가 없다. 다니엘의 세친구는 “잔치날”에 “고춧가루”를 뿌렸다.
다니엘서 2장은 다니엘과 황제의 만남, 3장은 세친구와 황제의 만남이다. 풀무불에 던져진 세친구의 이야기는 젊은 기독청년들에게 “꿈”을 준다. 느부갓네살은 악몽에 시달렸다. 세상의 위대한 권력자도 하나님께서 ‘꿈’의 함정에 빠지면, 빠져나갈 수 없다. 꿈은 하나님의 지혜다. 기독청년은 꿈을 받고, 그 꿈을 해결할 수 있다. 곧, 성령의 능력이다. 느부갓네살은 꿈을 꿨고, 다니엘은 그 꿈을 전혀 몰랐다. 그런데,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을 이겼다.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3장에서도, 느부갓네살은 금신상과 풀무불을 가졌다. 황제의 명령은 목숨줄을 갖고 있다. 세친구는 말단직원이다. 그런데, 경배하지 않았다. 집단적 몽유병에 동조하지 않는 양심의 결단!!
금신상에 절하지 않겠다고 세친구는 고집을 피웠다. 이런 고집불통이 어디에 있을까? 다니엘은 이때 뭘 했을까? 어쨌든, 황제는 꼴통 유대인을 만났다. ‘보수꼴통’이란 말이 있는데, 세친구는 융통성이 없다. 그냥, 속으로, “똥은 더러워서 피합니다. 저는 고개만 숙였고, 마음은 숙이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고개를 비딱하게 숙이면서 경배의 모양만 가지면 될 것을…. 세친구는 왕의 산해진미를 거부하듯, 금신상에 경배하는 것도 거절했다. 성령을 받은 자는 풀무불도 태워버린다. 성령의 불은 세상불보다 훨씬 뜨겁다.
<왕이 드디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지방에서 더욱 높이니라>
풀무불에 던져져 목숨이 끝날줄 알았으나, 오히려 결박이 풀렸고, 그 사건이 전화위복이 되었다. 현대사회에 풀무불과 같은 고문은 없다. 그러나, 직장과 학교와 일상생활에서 ‘풀무불’과 같은 환란은 있다. 양심을 지켰을 때, 불법을 거절했을 때, 후폭풍이 있다. 그것을 감당할지라도, 양심의 지성소를 포기해서는 안된다. 양심은 성령의 침대다. 기억하자. 금신상처럼 뿔괴물이 괴롭히더라도, 하나님이 돌맹이를 이미 던졌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