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9장에서 제자들이 서로 싸웠다. 멱살잡이는 아니지만, 편을 나눠서 다퉜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고, ‘누가 높냐’는 것이다. 가령, 베드로를 중심으로 갈릴리 제자자들과 마태를 중심으로 도시 제자들의 미묘한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할 당시에는 요한과 야고보가 노골적으로 ‘권력의지’를 드러냈다. 혁명에 성공하면, ‘장관’을 달라는 것이다. 요즘, 대선기간이다. 선거캠프마다 ‘동상이몽’으로 장관직을 바라보면서 후보들을 돕고 있을 것이다. 권력은 차지하면, 나눠 먹을 것이 많다. 곧, 전리품들이다. 제자들의 다툼에는 ‘권력’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다. 여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예수님이다.
“김치국물부터 마시지 마!!”
“꿈 깨!!”
이것보다 강한 어투로 주님은 말씀했다.
상황은 이렇다. 가버나움에 도착했을 때, 길거리에서 언쟁이 있었고, 상당한 고성이 제자들끼리 오고 갔다. 누가 크냐는 문제였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따로 불렀다. 그리고 “첫째가 되고자 하면 끝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했다. 쉽게 말하면, “왕이 되고 싶으냐, 그러면 노예가 되라!” “왕처럼 군림하고 있느냐? 너는 노예에 불과하다” 이 말씀은 철학적 궤변이 아니다. 공동체에서 ‘높고 낮음’의 서열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시청각 효과를 극대화시키려고, 집안에 있는 아이 하나를 데려와서 훌쩍 안았다. 그리고 다시 말씀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다” 이 말씀을 갖고, 성직자들이 “아이는 곧 목회자다”라고 해석한다. 그럴 수도 있다. 노예처럼 성도들을 섬기는 성직자라면, 과연 그러할 것이다. 초대교회는 사도들이, 제자들이 그렇게 살았다. 떠돌이 설교자로서 재산을 소유하지 않고, 오직 말씀을 전파하고 교육하는 일에만 몰두하면서 그들을 세상을 초월해서 살았다. 예수님의 몸이 되어서 실제로 살았던 제자들이다.
다시, 돌아가서, 마가는 “십자가 교육”과 “공동체의 삶”을 함께 연결해서 설명하고 있다.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지 삼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 (막9:31) 그리고 제자들의 서열다툼이 있었다. 제자들이 십자가 사건을 깨닫지 못한 이유가 바로 ‘권력의지’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교회의 건물이 높아지고, 교회 사명자들의 직위가 올라가고, 사회적 명성도 빛나며,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할 축복이 쏟아질 때, 사람들의 칭찬이 주어질 때, 조심해야한다. 그런 것들은 ‘십자가의 형상’이 아니기때문이다. 주님은 한사코 “십자가의 정신”을 말씀하셨다. 기독교의 헌법이 ‘복음서’라고 한다면, 복음서의 심장은 “십자가”다. 사람은 ‘머리’가 장식용이 아니다. 머리는 생각하라고 들고 다니는 것이다. 그처럼 십자가는 장식용 교리가 아니다. 그렇게 살라는 것이지, ‘십자가’는 세상을 정복하는 구원의 수단이 아니다. 십자가의 삶!! 기독교가 나아가야할 좁은 문이다. 교회 공동체에서 ‘공직자’ 개념이 강해지면,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적어질 수 밖에 없다. 논공행상을 따지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십자가’는 무엇인가? 나는 내게 묻는다. 나는 진실로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을까? 예수님이 말씀한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죽음’의 십자가였고, ‘살륙당함’이었다. 마가는 어떤 십자가를 짊어졌을까? 마태는? 요한은? 마가는 ‘십자가의 실체’에 대해 3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그것이 마가복음 9장인데,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어서, 사건이 이미지로 그려지도록 설명한 것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1) 공동체 내부에서 십자가 : 섬김의 십자가, 높은 직분을 가진 사람이 낮은 직분을 섬길 때, 교회 공동체는 결속하며, 이러한 공동체가 하나님의 나라이다. 곧, 하나님께서 함께 동행하면서 동거하고 살아가는 공동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는 것은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김으로, 아가페적 사랑으로 가능하다.
2) 공동체 외부에서 십자가 : 포용의 십자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으면서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을지라도 반대해서는 안된다. (막9:41)
3) 개인에게 적용되는 십자가 : 투쟁의 십자가, 42절에서 49절까지 범죄하는 지체에 대해 ‘제거하라’는 명령이 내려진다. 눈이 범죄하면 눈을 뽑고, 손이 범죄하면 손을 자르고, 발이 범죄하면 발을 자르라고 말씀하신다. 팔과 눈과 다리를 제거하는 ‘혁명적 할례’는 범죄와 전쟁이다. 자신이 자신에게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죄악과 전쟁은 목숨을 내걸고 투쟁해야 얻는 것이지, 그냥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루터의 이신칭의를 ‘황금방석’처럼 여기는 부류가 있다. 루터는 중세사회에서 ‘지옥에 갈 각오’를 하고서, 교황과 투쟁했다. 교황은 루터에 대해 “지옥”을 결정했다. 루터의 이신칭의는 철학적 선언이 아니다. 자신의 영혼을 내걸고 겪으면서 발견한 ‘진리의 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