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릿을 선물한다면, 남친에게 무엇을 뜻할까?
사탕을 선물한다면, 여친에게 무엇을 뜻할까?
빼빼로를 선물한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일까?
꽃을 선물한다는 것은 남녀 사이에 무슨 의미일까?
왜, 남자는 여자에게 집을 선물할까? 모두 사랑이다. 마음의 표현이다.
왜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아담에게 줬을까? 자선사업인가? 결코 아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모든 시간과 모든 재산을 ‘공산주의적 관점’에서 무료로 주는 이유는 사랑해서다. 남녀 사이도 ‘거래’는 무색해진다. 남녀 사이에도 ‘거래’가 존재하는 이유는 그만큼 거리감이 있기 때문이다. 베푸는 것이 일방통행인 것, 기독교 전문용어로 ‘은혜’라고 한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아담에게 그냥 줬다. 물론, 훗날 에덴동산 직장에서 아담은 해고당했지만….. 왜 해고당했을까? 왜 취직됐을까?
서론이 길었다. 거두절미하고,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모든 것을 허락한 이유는 ‘사랑’때문이다. 그 증표가 ‘하와’다. 혼자 있는 것이 보기에 좋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투영된 것이지, 결혼하지 않은 것에 대한 표현이 결코 아니다. 아담과 하와는 최초 인류가 아님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모세가 창세기를 적었는데, 고고학자도 아닐 것이고,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존재도 몰랐을 것이다. 그 시대 우주관이 그대로 반영된 채 창세기가 기록되었을 것이다. 과학적 오류는 허용되어도 창세기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신성은 변함이 없다.
아담도 아담의 부모가 있었고, 하와도 하와의 부모가 있었다. 그러니까, 남자와 여자는 그 부모를 떠나서 하나가 된다고 했다. 아담과 하와는 각각 부모를 떠나서 서로 연합한 것이다. 아담의 독처는 ‘결혼’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언젠가 아담이 결혼할 것이 분명한데, 왜 하나님은 ‘독처’에 대해 관심을 가졌을까? 아담은 에덴동산을 소유하면서, 그 에덴동산이 누가 줬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주셨건만, 그것을 깨닫기까지 한참 걸렸다. 교회를 다닐지라도 그저 형식적으로 다니면, 하나님을 명목적으로 믿기 십상이다.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 그 존재를 인정하면서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기까지 긴 세월이 지난다.
아담과 하와가 서로 결혼했다. 그렇다고 ‘독처문제’가 해결됐을까? 만약 그랬다면, 왜 무화과 나무로 잎을 가렸겠는가? 선악과를 따먹고서 공포에 빠졌는데, 그것은 쓸쓸함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 독처문제는 ‘하나님과 동행’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하와’를 아담에게 보냈고, ‘아담’을 하와에게 보냈다. 하나님이 그러한 존재임을 알리기 위해서다. 하나님을 배우자처럼 믿고 의지하며 사는 것!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네 남편을 데려오라”는 명령과 같다. 하나님은 호세아서에 고백되었듯이 남편과 같다.
선악과 따위를 따먹은 것에 하나님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변함이 없다는 뜻이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했다. 에덴동산은 축소되면서, 하나님의 사랑은 더욱 깊어졌다. 그것이 바로 ‘가죽옷’이다. 하나님을 옷 입듯이 하라는 의미이며, 옷처럼 앞으로도 함께 할 것을 말씀한 것이다. 선물은 그 마음이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지만,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 가정에 함께 동행했고,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도 하나님은 동행했다. 그리고 셋을 허락했다.
인간은 ‘하와’에게 모든 형벌을 떠넘기면서,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이라고 푸념한다. 그러면서 ‘하와’보다 못한 행실로 살아간다. 하와는 믿었던 가인에게 철저히 배신당하고, 뒤통수를 맞았다. 들판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고, ‘아벨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실종신고조차 되지 않았고, 가인은 오리발을 내밀었다. 부모는 아벨을 분명히 찾았을 것이고, 평소 둘의 관계가 좋지 않았으니 가인의 범죄를 눈치챘을 것이다. 부모는 가인의 죄를 알고, 어떻게 했을까?
성경에는 아담과 하와의 입장이 전혀 나오지 않지만, 가인이 집을 떠났다. 그때 아담과 하와는 ‘아벨의 죽음’을 몰랐을리 없다. 두 아들이 사라졌는데, 무관심한 부모일 수 없고, 특히 장남인 가인이 동쪽으로 도망쳤는데… 호언장담하던 하와도 이제는 낙망과 슬픔의 시간을 보내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지 않았을까? 그럴리 만무하다고 하면, 인생을 깊게 살지 못한 사람일 수 있다. 슬픔을 겪은 사람은 하나님께로 마음의 걸음을 돌린다. 아담과 하와는 셋을 낳았고, 그때부터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 자녀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부를 수 있었겠는가?
가장 소중한 무엇이 있다면, “가장 소중한 존재는 하나님과 같다”라고 고백하면, 신앙의 방향이 명확해질 것이다. 사랑하는 자식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듯이,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지음을 받은 사람에게 각각 가장 소중한 것을 선물로 주셨다. 성경적으로 ‘독생자’를 주셨고, ‘십자가’로서 구원을 베푸신 것은 널리 알려진 ‘죄사함의 은혜’이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살만한 여건을 선물로 베푸셨다. 곧 의식주다. 의식주는 하나님의 동행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내가 생명의 떡이고, 생명의 물이고, 생명의 집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엘리야에게도 “그릿 시냇가로 가라, 내가 떡과 고기를 줄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물과 밥과 집을 허락하셨다.
에덴동산처럼 부유함으로 실지 못하더라도, 엘리야는 가죽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으로 주식을 삼았다고 한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고, 그러한 모습으로 살아갔다. 곡괭이를 들고 땀을 흘려야 밥을 먹을 수 있는 그런 존재! 거기에 하나님의 동행이 숨겨져 있다. 고달파도 살 수 있는 길이 좁은문처럼 열린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있는 것이니, 행복할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하나님이 떠나지 않으면, 추락도 날기 위한 준비단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