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부 공동체의 참된 모습은 어떤 것일까?
– 인간의 참된 자아는 어떤 모습일까?

글을 쓰는 지금, 집이다. 오후 5시 9분, 궁감을 하나 먹고, 펜 대신 자판을 두드린다. 춘천 한마음 교회에 다녀왔다. 기록은 기억을 보증한다. 틈틈이 적은 수첩을 꺼내놓고, 기억을 추적한다. 그렇다. 그리스도의 흔적은 성경의 기록을 통해 가능하다. 사도들의 증언으로 기록된 성경은 구원의 공증문서다. 오늘, 춘천 한마음 교회에서 과연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우리에게 일어난 뉴스가 무엇이며, 그 사건 이후 우리가 해야할 소명이 무엇이며, 내 삶의 현격한 변화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들었다. 전봇대가 설치되고, 내 마음의 방안에 전등이 설치된 느낌이다.
[기록한 수첩을 보면서] 작은 수첩과 펜 두자루를 주머니에 넣고,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 출애굽기를 읽으며, 춘천행 itx 청춘열차를 타고 한마음 교회에 간다. 오전 7시 30분에 월곡산 집을 출발했다. 2시간 남짓 걸릴 것이다. 나그네 인생 모세의 삶은 언제나 나를 비춘다. 빛이 오듯, 나의 현실을 새롭게 조명하는 모세의 여정,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의 인생 좌표는 어디를 원점으로 삼고 있는가? 세상의 좌표축인가, 하늘의 좌표축인가?
남춘천에서 내려 택시를 탔다. 쾌속하게, 따뜻하게, 춘천은 언제나 그 이름처럼 봄날이다. 교회도 성령의 봄날이다. 자연의 봄은 떠나도, 성령은 지구를 떠난 적이 없으니, 지금도 여전히 생명의 봄날이다. 몇개의 횡단보도를 지나고, 기다리고 기다렸던 한마음 교회에 도착했다.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 신광야에서 자유를 얻었다. 나는 열차를 타고 횡단보도를 건너, 영혼의 자유를 교회에서 누린다. 교회가 천국의 대사관이라면, 나는 이미 천국에 있는 것이다. 2번째 오는 교회는 고향처럼 향긋하다.
나를 위해 자리를 맡아준 귀한 분 옆에 앉았다. 아! 어쩌면 천국에서도 나를 위해 자리를 맡아주실 예수님이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내가 늦더라도 나를 기다리며, 자리를 챙겨주실 예수 그리스도의 손길이 생각났다. 여기는 교회가 본부이고, 가정은 작은 교회다. 그러니까, 교회는 고향이고, 각 가정은 작은 교회인 것이다. 주일이 되면, 고향에 가는 자녀들처럼 모두 웃음꽃이 핀다. 아버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날이기 때문이다.
내 옆에서 까치처럼 타이핑을 치는 귀한 분의 손길은 피아노처럼 정겹다. 날마다 1~2시간씩 글을 쓰는 그녀는 작가보다 더 작가스럽다. 누가 작가인가? 날마다 글쓰는 사람이 작가다. 누가 부활의 증인인가? 날마다 부활을 체험하며 사는 자들이다. 타이핑치는 소리는 마치 16분음표가 연달아 나오는 소리와 같아서, 물방울처럼 들린다. 언어만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열고, 귀를 열면, 도처에 경음악들이 있고, 모든 사물과 상황은 수채화요, 추상화다.
나는 양처럼 다소곶이 앉아 기다린다. 나에게로 지금도 오고 있는 태초의 빛, 그리스도의 존재를 기다린다. 계시록 빌라델비아 교회에 나온 그 ‘열린 문’을 디자인한 듯한 ‘십자가의 문’은 다시 봐도 마음이 평온해진다. 그리고 숙연해진다. itx열차를 타고 오면서, 나그네처럼 미디안으로 도망친 모세가 첫아들의 이름을 ‘게르솜’(나그네)라고 지은 이야기를 읽었는데, 나에게 모든 나그네 여정이 어쩌면 고향으로 가는 길목일자도 모른다. 날마다 막막하거나 헤매거나 평탄하거나 얼룩지거나 모두 본향으로 가는 길목이다.
고개를 잠시 돌리자, 예배를 준비하는 분주한 걸음들, 각자 고요히 앉아 기도하는 차분한 고개들, 서로 반갑게 대화를 나누며 교제하고, XY축 현실에서 영적 Z축을 찾으려는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에 있다. 한없이 넓은 우주를 건축한 창조주께서 어떻게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시고, 다시 우리의 몸속에 들어오셨을까? 원자의 신비보다 더 신비로운 복음의 진실이다. 눈을 감고, 나는, 오늘, 성령의 사랑을 마시길, 그리스도의 몸을 먹길, 간구했다. 죽음의 유리벽은 언제나 내 앞에 있으나, 그것이 설령 깨어질지라도 두렵지 않는 것은 부활의 주께서 나를 위해 죽고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오후 5시 40분, 수첩의 기록을 정리하다가 잠시 기억에 빠진다.]
[수첩을 덮고, 글을 쓴다. 수첩에 없는 내용이 머리에 생각났기 때문이다.]
한주리 자매님의 간증 영상을 봤다. 유관순 누나처럼 복음의 증인으로 ‘죄의 형체’를 고백하며, 십자가의 도를 몸으로 체험한 사건을 있는 그대로 전했다. 그것은 어떤 교리가 아니고, 자신이 겪은 복음의 능력을 경험한 대로 말했다. 그래서 그 감동이 밀물처럼 내게 밀려왔다. 그녀를 점심시간에 만났다. 깜짝 놀랬다. 영상속 인물과 실제 인물이 달랐기 때문이다. 20년의 시간이 흐른 탓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식사교제를 하면서 대화를 나누다보니, 영상속 인물이 현실의 인물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된 것이다. 어쩌면, 어쩌면, 성경속 그리스도를 실제로 천국에서 만날 때도 이러할까? 그러할 것이다. 아멘! 20년이 흘러도 그녀의 증언이 변함없는 것은 그녀 안에 태초의 빛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성로 목사님! 나는 영상으로만 만났다. 2014년 8월 여름 수련회 영상을 봤는데, 영상과 실제가 같다는 깨달음이 왔다. 육체는 세월을 피하지 못해도, 진리에 사무친 영혼은 변함없이 빛날 것이다. 영상으로 본 김성로 목사님은 요한복음 1장에 나온 세례요한처럼 느껴졌다. 아!! 세례요한의 증언은 이러했으니,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니다”였다. 그러므로, 이튿날 예수 그리스도가 그를 찾아갔다. 김성로 목사님은 예배 시간 내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라”고 외쳤다. 곧, 바울의 중매장이 비유설교다.
[오후 5시 58분, 다시 수첩을 폈다]
1시간 남짓 글을 썼다. 쿵쾅쿵쾅, 오늘은 심장 두근거리는 일이 있었다. 주리 자매님과 그 남편, 주향 자매님과 그 남편과 딸, 우리는 함께 식사 교제를 나눴다. 글쎄, 주향 자매님의 소개로 한주리 자매님을 얼굴과 얼굴로 마주 보며 이야기를 하다니…. 그녀의 입술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을 듣다니…. 예수님이 지금 살아 계시다는 증언을 들었다. 게다가 그녀의 남편이 옆에서 그 증언을 확증했다. 보통의 부부와 전혀 다른 모습인 것은, 오직 그리스도와 복음으로 부부의 결속에 묶여져 있다는 것이다. 매일생한 불매향(梅一生寒 不賣香)이라고 했던가? 성령의 향기가 그 안에 있어서 부부의 모습이 새롭게 거듭났을 것이다.
현대인은 예수님과 복음을 지식으로만 아는 경향이 짙다. 모태신앙으로 살아온 그녀도 처음엔 그랬지만, 20년 전에 한마음 교회에 다니면서 마음으로 주님과 인격적 교제를 나누는 방법을 알게 되고, 부활의 주님이 지금 실존한다는 것을 깨닫고, 성경말씀이 실제라는 것을 믿게 되면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게 되었다.
사도행전에 성도들이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직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다고 누가는 증언한다. 식사교제다. 우리는 예배가 끝나고 식사를 하면서 예수님과 인격적 교제를 나눴다. 우리의 대화 주제는 예수님이니, 부활의 주님께서 우리의 식탁 가운데 계셨다. 월드컵 16강 진출에 대한 이야기는 언급될 틈이 없었다. 우리에겐 여전히 부활사건이 훨씬 큰 뉴스이기 때문이다. 주께는 천년이 하루와 같아서, 2천년 전 십자가 사건은 단지 이틀전에 일어난 일일 뿐이다. 충분히 현재다. 십자가 사건은 먼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이것이 주리 자매님의 증언이다.
그녀도 보통의 현대인처럼 가족의 갈등이 있었다. 교회를 다니지 않았던 남편으로 인해 마음속에 원망이 쌓여갔는데, 그녀는 교회는 모범생으로 출석했다. 그러던 어느날, 에베소 2장 3절 말씀이 비수처럼 마음에 꽂혔고, 구원문제가 그저 교리에 대한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부활의 주님을 새롭게 만난 그녀는 원망덩이에서 소망덩이로 바뀌었고, 새롭게 변화된 아내의 모습을 본 남편도 “도대체 교회가 어떻게 했길래?”라고 생각하면서, 교회에 오게 되었다고 한다. 술을 365일 마셨던 그녀의 남편은 술을 물론, 개과천선(改過遷善)해서 복음의 증인으로 살고 있다. 주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이 이뤄진 것이다.
[추가] 오늘 김성로 목사님의 영상 설교에서, 구원파의 위험성에 대해 들었다. 구원파는 특정 교단을 지칭하지 않고, 구원을 받은 순간 죄를 지어도 죄가 아니라고 믿는 자들을 말한다. 루터의 이신칭의 교리가 교묘하게 변질되면 ‘구원파의 병패’가 발생한다. 만약 대통령과 함께 산다면, 어떨까? 대기업 총수와 함께 식사를 한다면, 어떨까?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산다는 것은 실제사건인데, 심령의 성전에서 가능하다. 우리 몸은 주님의 성전이다. 그리스도가 우리 몸속에 계시니, 이제는 죄의 소욕, 곧 탐욕이 죽은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한 연합, 곧 성령을 통해 놀라운 영적 변화가 발생하니, 그리스도와 연합한 나는 새사람이 되고, 옛사람은 죽은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을 받은 사람이 범죄하면, 그것은 죄인가? 죄가 아닌가? 구원파는 죄가 아니라고 하지만, 성경은 그것을 죄라고 규정하고, 회개하라고 촉구한다. 부활의 주께서 면전에 있는데 과연 죄를 지을 수 있는가? 주님과 더불어 사는 사람은 동쪽이 서쪽에서 멀듯 죄와 멀다. 인간의 참된 자아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새로운 피조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