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7년동안 연구한 한자를 풀어놓다.
오늘로 2번째 한일문화교육원 경로대학 교육특강을 진행했다. 신당동 안쪽으로 들어가서, 배움에 열정의 눈을 뜬 어르신들과 만남을 갖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첫시간에는 스마트폰 활용교육을 했는데, 내가 너무 긴장했던 나머지 ‘폴더폰 사진촬영법’을 연구하지 못하여 무척 헤맸던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의에 대한 열정을 높게 평가받아서 또 불러주니, 강태공처럼 강단에 다시 섰다. 김춘수의 꽃 ‘詩’처럼 불러주지 않으면 꽃도 그냥 자연만물일 뿐이다. 불러줘야 꽃도 꽃이고, 새도 새가 된다. 이름없는 것은 무명씨로 그저 흘러간다.
오늘은 나에게 주어진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1달전부터 이번 강의를 준비했다. 7년동안 한자에 대해서 나름대로 연구하고, 동이족이 한자를 만들었다는 상식위에서 어떻게 하면 한자를 쉽게 재밌게 이해할 수 있을지, 그것을 보여주는 강의를 오래전부터 준비했었고, 기회의 새가 나에게 날라왔으므로 나는 기꺼이 모든 열정을 쏟았다.
나는 생각한다. 쉽고 재밌고 흡인력있는 강의는 고통의 산물이라고. 내가 어렵고 복잡하게 연구하지 않으면 결코 강의는 쉽게 풀리지 않는다. 강의가 어렵다면 그것은 강사 스스로 연구하지 않고, 복잡한 실타래를 풀어놓은 것일 수도 있다. 나의 강의가 그렇게 되지 않기위해서 나는 한자배열을 이렇게 했다가 저렇게 했다가 수십번을 뒤집기도 하고, 다시 재편집해서 그날에 이러한 배열이 어떻게 효력을 발휘할지 상상의 모의실험을 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나는 목청을 올리지 않았다. 내가 옳고 타당하고 설득력있는 말을 한다면 모두가 공감할 것이고, 혹시 누군가 존다면 그것은 1%의 오차로서 이해의 품으로 넘어가야하는 일이다. 모두가 사연있는 삶을 살기 때문에 모두의 만족을 줄 수는 없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만족스럽다면 그것으로 족(足)한 것이다.
2. 피카소는 한자를 사랑했었다.
한자는 어렵다. 이게 보편적인 이미지다. 나도 역시 그랬다. 7년동안 나는 어려운 한자를 쉽게 배우는 방법이 무엇인지 골똘히 연구했고, 그 해답을 2~3년전부터 발견하였으나, 내가 언론인이다보니, 혹은 작가로서 활동하다보니 한자에 대한 통찰력을 책과 강좌로 풀어낼 기회를 놓쳤다. 강의요청은 몇 번 있었으나 내가 스스로 거절하기도 했고, 책출판도 다른 방향에 초점이 맞춰졌었다. 그러다가 한일문화교육원 경로대학과 맞물려 강의요청이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한자강좌의 방향을 잡았다. 내가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그 ‘피카소 한자’를 선보인 것이다. 피카소는 추상화의 대가이다. 그가 한자를 사랑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생각해보면 매우 당연한 일이다. 추상화로 점철된 문자가 바로 한자이기 때문이다. 人 木 山 目 耳 口 己 등등 모든 상형글자는 그 자체로서 아름답다. 일반인으로서 내가 보기에도 디자인이 세련되어 보이는데 화가의 눈으로 봤을 때 이러한 글자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상상해보면 피카소가 한자를 통해서 다양한 영감을 얻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는 화가는 아니다. 그러나 피카소가 한자를 좋아했었다는 이야기를 나도 전해듣고서, 한자를 정말로 그림으로 보려고 노력했었다. 문자로 한자를 보는 것은 딱딱할 뿐이다. 그림은 누구나 좋아한다. 이런 발상의 전환이 한자를 보다 편안하고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했다. 木을 정말로 나무로 봤고, 왜 나무인지 구체적으로 따지면서 연구했더니 나무의 디자인이 이처럼 아름답다는 것을 실감했고, 이러한 연구의 결과가 이번 강좌로 알려진 것이다. 그림과 그림이 만나면서 새로운 그림을 그려내는 화가처럼 이제는 한자공부가 더 이상 어렵지 않고, 유명화가의 전시회를 쓱 들어보고 나왔다는, 풍경화를 20점 정도 감상하고서 느낌이 꽤나 역사를 알았다는…. 인문학의 강물에 마음을 씻었다는 그런 느낌이 들게…. 나의 강좌가 앞으로 그러한 평가를 받길 꿈꿔본다.
3. 지음(知音)의 벗, 정지윤 명지대 교수님
지음(知音)은 마음을 알아주는 벗을 뜻한다. 춘추전국시대 거문고의 달인 백아(伯牙)와 그의 벗 종자기(鍾子期)와의 우정에서 비롯된 말이다. 종자기가 백아의 거문고 소리를 마음으로 알아줬다는 의미다.
정지윤 명지대 국제교류경영학 교수님 덕분에 한인문화원과 강의로서 인연을 맺게 됐다. 아무래도 정지윤 교수님의 고마운 마음이 지음(知音)과 같다고 느껴지곤 한다. 한자에 대해 내가 조금 깊게 안 것일 뿐인데, 그러한 기회를 선뜻 나에게 내어주고 1시간 내도록 사진촬영과 함께 강의에 대해 ‘고래도 춤추게 할 칭찬’으로 격려를 해주니, 나로서는 더욱 부담감과 함께 강의에 충실해야함을 느낀다.
첫 번째 강의때는 스마트폰 활용 강의를 했었는데, 폴더폰 사용법에 대한 미숙함과 너무 큰 목청으로 내가 거의 목이 쉬어버렸다. 강태공이 무대를 만난 듯, 내가 쥔 마이크는 내 목소리를 마치 흡인력있게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시간은 촉박하고, 내가 알려줄 것은 많고 그래서 강조하고 강조한다는 것이 높은 목소리로 표현됐다. 충분히 큰 목소리에 마이크를 사용하니 강의실은 쩌렁쩌렁 울렸다고 한다. 나중에는 “마이크 없이 강의해도 될 뻔 했다”는 말까지 나왔으니…. 그때를 반성하면서 오늘은 마이크와 함께 하는 잔잔한 어투로서 강의를 진행했다. 목이 아프지도 않으면서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까 이해가 되는 듯 제법 흩어지지 않은 자세에 나도 긴장감이 감돌았다. 1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모두 딱딱한 한자강좌일 줄 알았나보다. 공자왈 맹자왈 문장을 펼쳐놓고서 한동안 하고싶은 이야기를 풀어놓을줄 알았나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기회를 준 고마운 사람의 기대를 져버릴 수도 없는 것이며, 내 스스로에게도 내가 자긍심이 느껴질 정도로 오늘 하루에 최선을 다해야겠기에, 준비했던 것을 모두 펼쳤다. 지음(知音)의 벗은 늘 소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