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함과 진로
간절함은 곧 절실함이다. 간절(懇切)에서 절(切)은 칼로 끊는다는 의미이고, 간(懇)은 호랑이가 사냥감을 잡으려고 멈춰서서 예의주시하는 것이다. 懇은 豸艮心의 합성이다. 호랑이가 사슴떼를 사냥할 때, 자세히 보면 사슴떼를 쫒지 않는다. 사슴을 쫒는다.
간절함의 핵심은 오직 1마리의 사냥감을 쫒는 것이다. 이는 1목표주의와 동일하다. 목표가 많으면 그것은 목표가 없는 것과 같다. 국어시간에 영어공부하고, 영어시간에 수학공부하는 학생은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실이 ‘땡감’ 수준이다. 목표가 명확해야 명중할 수 있다.
호랑이는 출발전에 이미 사슴떼속에서 한 마리 사슴을 택정한다. 그 사슴을 쫒는 것이지 절대로 사슴떼를 쫓지 않는다. 멀리서부터 쫓아가다가 그 사슴을 향해서 질주한다. 바로 앞에 더 좋은 사슴이 있어도 사냥하지 않는다. 호랑이의 목표는 그 사슴이니까 그 사슴을 향해서 달려가는 것이다. 목표는 오직 1개이다.
忠은 목표를 1개로 정한 마음으로서, 신하는 그 목표가 임금이다. 임금은 해처럼 1명이며, 충신의 마음은 임금을 바꿀 수 없다고 믿는 것이 유학이다. 정몽주는 그래서 일편단심으로 죽었고, 정도전은 ‘왕’(王)을 왕권의 개념으로 재해석하면서 왕권은 유지하고 사람이 바뀌면서 새로운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즉, 나라는 곧 백성이라고 본 것이다.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진 분깃점이다. 정몽주나 정도전이나 결국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상세계에 대한 확실한 신념을 향해 질주했던 것이다.
목표는 다른 말로 ‘진로’이다. 진로(進路)는 ‘새가 나아가는 길’을 말한다. 새가 나무에 앉아있다가 바람이 불면 날아오르지만, 언제까지 날개짓만 할 수 없다. 기러기떼가 만약 어디론가 이동한다면 그 목적지가 분명하다. 목적지가 없이 날개짓하는 것은 ‘낙옆’의 방황일 뿐이다. 목표가 명확할 때 그 삶의 몸짓이 날개가 될 수 있다.
‘목표’는 정할 때 확인하고 확인하고 확인해야만 한다. 왜 운동선수들이 금메달을 따려고 그렇게 몸부림칠까? 그것은 그 목표와 함께 명예가 명확해서 그렇다. 대회는 많지만 그 대회에서 1등의 목표를 갖는 근본 목적은 그 의미가 모두 각각일 것이다. 이처럼 인생의 진로도 그 목표가 분명하고, 스스로 정해야한다. 이 목표가 잘못 정해지면, 목표를 달성하고도 후회하게 된다. 이것은 스스로 첫단추를 잘 꿰어야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다시 돌아가서, 간절함은 무엇인가? 호랑이가 사슴을 먹을지, 토끼를 먹을지, 다람쥐를 먹을지, 오늘 점심메뉴를 정하는 것이다. 사슴을 점심으로 먹으려면 사슴이 잘 다니는 들판의 식당가로 걸음을 옮길 것이고, 다람쥐를 점심으로 먹으려면 골짜기로 들어갈 것이다. 점심메뉴가 정해졌으면 그곳으로 이동해서 먹잇감이 지나길 기다렸다가, 그 먹잇감이 목표로 정해졌으면 모든 힘을 질주해서, 그것을 잡는 것이다. 다람쥐를 먹겠다고 마음을 정했는데, 질주를 다해서 다람쥐를 잡았는데, “그냥 사슴을 먹을 걸….”라고 호랑이가 생각한다면, 그것은 목표설정에 대한 스스로 신뢰가 없는 것이다. 이처럼 진로에 대한 불확실성이 훗날 학생들의 대학생활에 심각한 피해를 입힌다. 평생 후회하지 않을 자신의 미래 직업을 결정하는 일인데…. 자유학기제는 정말로 정말로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다. 간절함으로 자신의 인생목표를 정하기 위해서 1년동안 간절함으로 직업과 진로와 다양한 사회시스템을 경험하다보면, 자신에게 맞는 그 진로를 모두 찾지 않을까? 간절함은 곧 자신이 평생 가야할 외롭고 고독하고 쓸쓸하면서 ‘행복한 마이웨이’의 인생길, 진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