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영화 곡성 후기]=슬픔은 예례미아 선지자다. 다윗을 통한 위대한 통일왕국이 솔로몬 이후 남북으로 분리되고, 결국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시리아)에게 멸망, 남유다는 바벨론에게 멸망당한다. 하나님을 믿는 민족이 도대체 왜 이방민족에게 끌려가 포로생활을 하게 되는가? 왜 우상을 없앤 요시야 왕은 죽어야만 하는가? 그 사건을 놓고서 민족의 애가(장송곡)을 부른 성서가 ‘애가’이다.
이정현 국회의원이 개편된 행정구역으로 ‘곡성과 순천’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 지역의 이름은 ‘곡성’(曲城)이다. 골짝이 매우 깊고 성이 존재했던 것 같다. 哭聲과 曲城은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이다. 5월 26일 바우하우스 롯데시네마에서 관람한 영화 곡성은 정말로 의시시하다. 오싹하고, 사람의 마음을 혼란케 하면서도 너무 지저분하고 괴상한 그런 ‘의심’의 장치들은 ‘괴팍한 감독의 모순’을 느끼게 한다. 현란한 장면들로 관객을 그렇게 속이고 싶었을까?
나홍진 감독의 서비스 불량이다. 관객은 나홍진 감독의 연출을 따라서 영화를 관람해야할 운명이다. 그런데, 관객은 감독을 믿고 관람했는데, 편집을 통해서 관객을 속여버리면 그 목적이 뭔가? 도대체, ‘악’(惡)과 ‘선’(善)의 모호한 경계선에서 뭘 하라는 것인가?
황정민이 연기한 ‘일광’(日光) 무당은 그 이름에서 일본인과 연결되어서 입는 옷도 일본스타일, 하는 짓도 한국전통문화를 없애는 일본식 굿내림을 한다는 것인데, 사람의 행위가 그 근본이 어딘지 스스로 파악하는 것도 정말로 신중하고 중요하다. 나홍진 감독의 곡성 영화 역시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근원으로 있으면서 그것의 그림자로서 나홍진 감독이 연출한 것이지 않을까? 일광 무당과 일본인 외지인의 관계설정의 공식으로 풀이해본다면……
‘무당 잡굿’도 ‘무명의 수호천사’도 ‘외지인 일본 스님’도 경찰까지도 모두 무용지물이다. 그들은 아무런 대응책을 마련해주지 못했지 않는가? 무명이 마지막으로 종구의 손을 잡고서 ‘가지 말라’고 하는데, 그것은 무기력한 것이다. 새끼줄에 부적 비슷한 것을 설치한다고 해서, 근본적인 살인을 막을 수 있을까?
영화 곡성(哭聲)은 ‘살인자’도 결국 ‘도구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게다가 무당은 ‘영적인 의사’가 아니라 오히려 ‘영적인 살인자의 앞잡이’로 존재하니, 너무나 끔찍하다. 종교인들의 책임이 얼마나 무서운지….. 왜 곡성일까? 순천에서 곡성으로 넘어가는 그 송치재 매실밭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세월호 참사의 주범을 떠올리게 한다.
감독은 상징적인 의미도 그곳에 두는 듯 하다. 종교인이 왜 그토록 무섭고, 끔찍할 수 있는지…. 의문의 죽음은 곧 의문의 사건사고들, 각종 범죄들은 어쩌면 종교인들이 비밀리에 저지르는 ‘굿의 결과물’이라고 말하는 듯 하다.
물증은 없지만, 종교인들은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으니….. ‘사진기’는 그 인물의 취미였지 않던가? 그래서 그렇게 죽었던 그 변사체가 악마가 되어서 이제는 더 큰 연쇄살인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인가??
국가의 장송곡은 그 정도에서 끝난 것이다. 이 영화의 결정적 모순은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배제시켰다. ‘영은 살과 뼈가 있다’라는 대사는 J이 사용한 성경의 말씀인데, 그것은 정말로 고귀하고 신비로운 ‘사랑의 흔적’이다.
본래 의미는 ‘영’이 ‘귀신’을 의미한다.
누가복음 24/38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영”은 “귀신”들을 말하고, 부활의 주님은 영체로서 형체가 분명히 존재하므로 ‘사랑의 완성체’가 되었으니 ‘평안함’을 준다. 그런데, 영화의 마지막 그 음침하고 깊은 동굴에서 그 일본인은 ‘무섭고 지저분한 형체’로서 손바닥에 못자국을 보여주면서 그런 말을 하니, 참으로 나홍진 감독은 ‘기독교’에는 점수를 너무 적게 주고, 한국 토속신 ‘무명’에게는 점수를 많이 주는 듯 하다.
J은 분명 ‘사랑’이다. 손바닥에 못자국이 있다고 해서 J인 것이 아니다. 사랑의 십자가로서 인류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평화의 빛을 비추니 ‘안녕’(샬롬)으로서 불안하지 않다. 무당 일광(日光_일본의 빛)은 1000만원의 돈을 요구하면서 잡굿을 했고, 게다가 일본 외지인도 잡굿을 하면서 불안을 줬다.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은 ‘무과실 책임’으로서 모두가 공범이다. 경찰은 지키지 못했으니, 해경(海警)이 해체된다고 해서 세월호 참사가 해결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망령의 장송곡만 울려퍼진 것이니….. 무명의 그 새끼줄도 ‘한풀이’에 불과한 것인가?
나홍진 감독은 ‘일본인 스님’(악마)과 ‘낫을 든 신부 사제’을 일치시키면서 종교의 경계선을 요상케 만들었다. 기독교와 잡것의 무당 굿이 비슷한 것이 아니냐는 그런 혼동을 주는데, 웃기지도 않다. 제물은 구약시대 풍속이고, J이 오면서 동물을 제물로 드리지 않는다. 드라마 안에서나 가능한 것이고, 사람의 마음은 믿음과 행위가 온전하면 온전한 것이다.
‘주술’(呪術)은 정말로 무서운 것 같다. 특히 황정민이 연기한 ‘일광 무당’은 돈은 돈대로 챙기고, ‘영적인 문제’를 근본적으로 치료하지도 못한채 마을의 잡귀신을 못으로 박아 죽이는 그런 정도니, 게다가 본인이 사진을 찍는 듯 하나 일본인이 사진을 찍으니 그것으로 사진을 찍는 것에 불과한 그림자 존재에 불과하니, 사람이 사람으로 존재할 수가 없지 않는가? 마을의 수호신(守護神)도 터주대감처럼 그저 무기력한 혼령에 불과할 뿐이다. 마지막 장면에 보면 ‘곽도원’과 ‘천우희’가 털썩 주저앉았으니 이렇게 나약한 지킴이가 어디에 있는가?
국가의 울타리가 무너졌고, 경제도 무너졌다. 가계빚이 1300조원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데 정부가 마땅히 내놓는 대책이 도대체 무엇인가? 종교인들의 사회적 책임이 땅에 추락한 지금에, 이제 이란과 교역을 통해서 이슬람 문명이 본격적으로 한국을 침략하면 ‘IS’의 테러가 서울 한복판에서 발생하지 말란 법이 있는가? 국가는 이처럼 ‘무명의 새끼줄’ 정도로 흐리멍텅하다.
과학으로 입증하지 못하는 영적인 존재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영적인 존재를 책임져야할 종교인들이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면, 변질된 양심으로서 사회적 악행을 일삼는다면, 그것은 종교인들이야말로 ‘연쇄살인의 살인적 만행’의 주범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영화 곡성의 전반적인 내용은 무섭고, 앞뒤가 맞지 않고, 영적인 세계에 대한 황당한 설정이 ‘요상하게’ 느껴졌지만, 중요한 것은 본인이 본인의 양심을 지키면서, 신앙생활을 신실하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는다.
또한 ‘영적인 존재’를 명분삼아 이상한 악령의 주술에 휘말려서, 정신병자처럼 살아가는 그런 짓거리(독버섯의 마약의 의미)로 살아서는 더더욱 안될 것이다. 각자 자신의 생활에 최선을 다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국가의 경제는 이미 무너졌고, 종교인들의 사회적 책임의 울타리도 세월호 참사처럼 이미 변사체로 실종당했는데, 이제 각자 자신이 자신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소중한 인생의 미래일 것이다.
아~~~ 꿈자리 사나울 것 같다.
PS 나는 두 경찰이 일본인 외지인의 산골집을 방문했을 때, 죽었던 사람들의 사진들이 찍혀있는 것을 발견하고도 벌벌벌 떨기만 했지, 그 즉시 ‘용의자 체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말로 이해되지 않는다. 경찰인데 그런 사진을 보고서 공권력을 동원하지 않았다(?) 나홍진 감독이 경찰의 사명감을 너무 간과한 것 같다. 미세스캅2 김성령의 연기를 보면 경찰의 활약상은 대단하다. 2명의 경찰이 엄청난 사진들을 목격하고서 어떤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 말이 안된다.
게다가, 종구가 무당 잡굿을 하면서 ‘살’을 날리는데 1천만원을 쓴다는 것도 황당하다. ‘미끼’를 문 것이 바로 ‘1천만원’이 아니던가? 무당들은 꼭 그렇게 한다. 병주고, 약주는 식인데, 돈을 빨아먹으면 먹을대로 들러붙고서 치료하는 듯 마는 듯 하는 족속들이다. 사람도 누군가를 돕는데 ‘근본’을 치료하지 않고서 ‘병’을 미끼삼아 자신의 이권을 챙긴다면 ‘무당족속’에 불과하다. 무당(巫堂)은 지킴이가 아니라 ‘거머리’에 불과하다.
딸의 아버지로서 종구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서, 무당의 굿을 멈추게 하니, 그제서야 딸이 제정신이 든다. 치료를 하는지 정신을 더 혼란스럽게 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악을 없앤다고 ‘악’을 모시는 격이다. 우리나라가 그렇지 않았나? 중국을 물리치려고 일본군을 데려오면서 일제 식민지가 시작되었고, 일본이 물러간 후에도 미국의 통치가 지속되었다. 이런 것은 근본문제 해결이 되질 못한다. 결국, 종구가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그곳을 쳐들어가서 산당을 없애버리니, 결국 딸이 나았다. 이처럼 모든 문제의 근원을 찾아서 발본색원(拔本塞源)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