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해볼 사람?”
“저요!!!”
그런데 막상 일어서면, 버벅버벅 한다. 심장이 쿵쾅쿵쾅 거리면서 교실 전체를 상대로 말해본 적이 없는 그때 그 순간의 떨림은 무대 공포증이다. 기회는 그처럼 그 순간에 오는가?
기회(機會)는 베틀 기(機)와 모일 회(會)가 합쳐졌다. 모일 회(會)는 누가 봐도 밥을 먹기 위해서 밥상앞에서 모여있는 모습이다. 오순도순 가족이 모인 것이고, 모닥불 주변에 사람이 모인 모습이 ‘會’이다.
베틀 위에서 모였다는 것은 씨실과 날실이 서로 모였다는 의미다. 기회는 곧 씨실과 날실의 만남이다. 날실은 칼날처럼 세워진 실이다. 씨실은 씨를 뿌리듯이 가로로 왔다갔다하는 실이다. 세로로 세워진 날실에다가 가로로 씨실이 오고가면서 밭에 씨를 뿌리듯 실이 엮어진다.
기회(機會)의 뜻은 야구에서 자주 등장한다. 야구 선수가 아무리 강하게, 좋은 폼으로 방망이를 휘둘러도, 공의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면 안타가 나오지 않는다. 공의 위치를 맞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공의 타이밍을 맞춰야한다. 공을 어디로 던질 것인가? 공을 얼마나 빨리 던질 것인가? 거기에 맞춰서 배트가 나가는 타이밍이 정해진다. 강속구일 때와 변화구로 들어올 때는 완전히 다르다. 기회(機會)는 베틀위의 씨실과 날실이며, 야구 방망이와 야구공이 만나는 것이다.
나에게 어떻게 공부를 잘하느냐고 학부모들이 자주 묻는다. 학생들도 묻는다. 학원에 다닐지, EBS 강좌를 시청할지, 스스로 학습을 할지, 과외를 할지….. 내가 다니던 학창시절과 지금은 학업분위기가 정말로 다를 것이다. 학생부 종합전형으로 대학에 들어가는 시대가 되었으니, 공교육의 중요성은 갈수록 커질 것이다.
나는 성적은 시간의 함수라고 생각한다. 공부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성적은 비례해서 올라간다고 믿는다. “믿을 수 없다”고 반박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명제를 고집한다. 학생이 공부에 가장 많이 투자하는 시간이 어딘지 면밀히 살펴보면, ‘학교’다. 학원이든, 집이든, 가장 많은 시간 공부하는 시간은 ‘학교’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학교에서 정해진 시간에 따라 공부하는 것이 학생의 책임이다.
학생들이 조금만 의식하면, 마치 소풍을 가는 그런 설레임으로 내일의 수업을 준비하는 학생이 있다면, 그 학생은 교실에서 모든 지식을 뇌에 담을 수가 있다. 사람의 뇌는 한정되어 있다. 똑같은 것을 10번 반복하는 것보다 한번에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 훨씬 낫다. 반복하고 반복하고 반복하고 반복해도 외워지지 않는 이유는 한번에 정확하고 깊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확히 이해하려면, 미리 예습하고, 그 수업을 기대하면서 발표도 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예습하고, 수업시간에 완벽히 소화하고, 집에서 복습하면 그 지식은 완전히 자신의 소유다.
‘소풍가듯 내일의 책가방을 준비하라’고 주문하고 싶다. 나에게 공부의 비법을 묻는 학생이 있다면…. 그 수업이 보잘 것 없는 과목일지라도…. 늘상 준비하고, 앞서 배웠던 것을 다시 읽어보고…. 전날 다음날 수업을 예습하고, 10분의 쉬는 시간에 다음 수업시간을 한번 더 예습하면서 수업을 설레임으로 기다린다면, 그 학생은 눈빛이 살아있다. 초롱초롱한 눈빛은 지식을 담는 능력이 있다. 교사가 주도권을 가지고 혼자서 칠판에 적고서 떠들다가 가더라도, 미리 예습하면서 그 수업을 준비한 학생은 분명히 얻을 것을 얻는다. 성적의 기회는 ‘교실의 수업시간’에 있음을 나는 확신한다.